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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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40)-5.16 군사혁명(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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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과 오히라 

 

 

 

(지난 호에 이어)
2) 1962년 3월, 구정치인을 정죄하는 ‘구정치인정화법’을 발표하였다. 이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을 하였고, 박정희는 대통령대행직을 물려 받았다. 동년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수반으로 역임케 하였다.


3) 1963년 중반, 박정희는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공약과는 달리 육군대장으로 예편을 하였다. 예편 후, 곧바로 민주공화당에 입당을 하여 제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하였다. 


이 무렵, 구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구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후 군정연장과 군정반대를 놓고 야당들이 갈등을 하게 되었다. 야당통합의 명분을 걸고 ‘국민의 당’이 창당되었으나 윤보선, 허정, 이범석의 갈등이 심화되어 야당내 대립은 격회되었다.


4)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를 치렀다. 공화당의 박정희, 민주당의 윤보선의 대결이었다. 유권자의 84.99%가 투표를 하였는데 박정희가 46.7%를 얻어 약 15만표 차이로 윤보선에게 신승을 하였다. 박정희의 지지율은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압도적이었다. 


■대한민국과 일본간의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혁명을 하고 나서 국가의 살림살이를 맡아보니 너무도 가난한 나라가 되어 살림살이를 일으켜 나갈 수 있는 밑천이 없었다. 외국에서 돈을 빌려다가 국가의 산업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외국 어느 나라도 군사정부에게 돈을 빌려주지를 아니 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정부에서 5.16군사혁명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면으로 애로가 많았다.


박정희는 독일에 가서 뤼부께 대통령에게 눈물의 하소연을 하여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3개월분 월급을 담보로 하여 차관을 얻어 오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경제개발을 하고자 하는 웅지는 크지만 자본금이 없으니 어찌해야 공장을 짖고 기술을 연마할 수가 있을 것인가? 


GNP는 83불밖에 안 되고, 대학을 나온 고등실업자들은 다방에 모여 담배나 빡빡 피우고 앉아 있고, 공장이라고는 영등포 구로동에 있는 삼립건빵공장이 전부이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의 산업을 일으킬 수가 있을 것인가? 생각은 많지만 현실은 암담하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對日 재산 및 청구권 문제’였다. 얼마를 어떻게 해야 받아 낼 수가 있을 것인가? 그것을 받아 오면 목돈이 생길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경제개발의 밑천을 삼는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과연 그리 쉽사리 돈을 내줄 것인가?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일본에게, 36년간 우리를 괴롭히고 재산을 빼앗아간 보상문제를 풀어 보자고 제안을 하였다. 돈이야 많이 받아올수록 좋겠지만 어찌 그자들이 그리 쉽게 내어 주겠는가? 


1년여를 두고 흥정을 하고, 회담이 결렬될 뻔도 하고, 학생들은 굴욕외교라고 매일 데모를 하고, 차라리 집어치우라고 국민들은 아우성을 치는 판이었다. 하지만 박정희에게는 그것이 일억 불이건, 십억 불이건 받아오지 못한다면, 어떠한 수단으로라도 경제개발을 할 수 있는 희망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수난 끝에 타협을 본 것이 바로 대일본 재산 및 청구권 문제의 해결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는 즉각 한국의 신정부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1961년 11월 22일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였다. 이 협상 내용은 ‘김-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후일 김종필은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김종필-오히라 마사요시 합의사항


1.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5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2. 대외 협력기금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푼 5리(정부 차관) 


3.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민간 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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