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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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 (19)-기미(己未)년 3.1운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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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5) 제암리 학살 사건 -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장날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던 일본 군인들이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 놓고 문을 잠근 채 불을 질러 23명이 타 죽었다. 


창문으로 넘어 나오는 사람들은 총칼로 찔러 죽였다. 동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시신을 거둘 형편도 못 되었는데 캐나다의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불에 탄 시신들을 거두어 뒷산에 묻어 드렸다. 지금은 23구의 합동묘로 잘 가꾸어진 관광묘소가 되었다. 

 

 

 

 

 


 캐나다의 이민 동포들은 이에 감사하여 ‘스코필드박사 동상건립위원회’(이사장 강신봉)를 만들고 한국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토론토동물원 한국정원 내에 235cm의 스코필드 박사 동상을 건립하였다.

 


(1) 평안남도 사천 학살 사건 - 1919년 3월 3일, 개신교 목사 한예헌과 천도교 교구장 이진석, 최승택, 김병주 등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헌병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73명을 학살하였다. 시위 군중은 헌병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 2명을 타살하였다. 


(2) 평북 정주군 곽산 학살 사건 - 곽산 그리스도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수천 명이 시위에 동참하자, 일제는 지도자 박지협을 죽이고, 체포한 100여명 중 50명을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케 하였다. 시위 군중에게 광견을 죽이는 쇠갈고리를 휘둘러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케 하였다. 


(3) 경기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학살 사건 - 1919년 4월 3일, 시위군중이 화수리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순사 1명을 타살하자 11일 새벽에 헌병과 경찰들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을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서 수십 여명을 학살하였다. 40여 가구의 동네가 거의 다 불타고 18가구만 남았다. 


(4) 평남 맹산 학살 사건 -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사건 며칠 후 일본군이 기독교인 지도자 한 사람을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고문을 하자 군중들이 몰려와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들을 분견소 마당으로 끌어들인 후 문을 잠그고 60여명을 총살한 사건이다.


(5) 대구학살 사건 - 대구에서는 2만3천명이 시위를 했는데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김용해 부자가 투옥되었는데 며칠 후에 모두 사망하였다. 


(6) 경남 합천 학살 사건 - 3월 16일, 야로면 주민들과 해인사의 승려 등 1만명이 시위를 계속하였는데, 3월 19일에 5명 체포했다. 22일에는 3만 여명이 시위를 하였는데 일본군의 발포로 42명이 사망하고 100여명 부상, 같은 날 초계면에서도 8,000명이 시위를 하였는데 발포로 5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7)남원학살 사건 - 1919년 4월 3일, 800여명이 모여 식수기념행사를 하고 19개 면장 등이 만세를 선창하고 시위를 시작,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발포로 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20여명이 체포되었다.


(8) 익산 이리 장날 만세운동 - 기독교인인 군산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가 1919년 4월 4일 장날을 이용하여 300여명이 시가행진을 하니 그 수가 점점 늘어나 1,000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이에 소방대원과 농장원 수백 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곤봉 쇠갈고리 등으로 시위대와 대치했다. 문용기가 오른 손에 태극기를 들고 연설을 하자 헌병이 칼로 오른 팔을 베었다. 그는 다시 왼팔로 태극기를 들고 연설을 계속하니 왼팔도 베어버렸다.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만세를 부르니 헌병은 다시 그의 몸을 칼로 난자하여 현장에서 순국했다.  


(9) 군산 3.5 만세운동 - 전북 군산에서 영명학교 출신 김병수가 민족대표 33인 중 이갑성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20장을 받고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군산의 영광여학교, 구암교회, 시민 등 500여명이 3월 5일에 시위를 시작함에 그 수가 3만 명으로 불어났다. 일제의 폭력진압으로 53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실종되었으며 195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는 3.1운동이 벌어진 후 최초로 한강 이남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이기에 그 의의가 크다. 


(10) 만주 용정 만세운동 - 만주에서의 대표적인 시위는 3월 13일 용정에서 3만 여명이 참가한 시위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는데, 시가행진을 하자 중국군대가 시위자들에게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3.1운동을 차단하기 위하여 심양에서 조선인회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조선인과 일본인과의 차별철폐를 요구하였다.


3.1독립운동 이후 일본정부는 조선통치 방식을 무단정치에서 회유정치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 결과 다소의 단체활동 및 언론활동이 허가되었고, 기초적인 초등교육이 확대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 부드럽게 하는 척하면서 친일파를 양성하여 조선민족의 분열을 조장하였고, 일본정책에 동조하게끔 모든 회유책을 동원하였다. 


3.1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한민족의 일치단결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은 이러한 우리의 뜻을 받아들여 대한민국 수립과 독립국가로 인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오랜동안 설마의 역사에 취해 있던 우리 민족이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 3.1운동이다. 그 때에 다시는 그러한 설마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많은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삼일절 노래


 기미녀 3월 1일 정오 /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 태극기 곳곳마다 / 삼천만이 하나로 / 이 날은 우리의 의요 / 생명이요 교훈이다 / 한강물 다시 흐르고 / 백두산 높았다 /선렬아 이 나라를 보소서 /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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