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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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해설(11)-장수가 싸움의 중심이다
samkang39

 

 장수는 나라의 대들보다(將者 國之輔也 장자국지보야). 대들보가 튼튼하면 나라가 강하고, 대들보가 썩으면 그 나라는 약할 수밖에 없다. 싸움의 중심은 장수다. 임금도, 병사도 모두가 장수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어있다. 


 임금이 장수를 임명하지만, 일단 전쟁터로 떠나는 장수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것 또한 임금의 자세다. 그래서 용병의 원리는 일(一)이라는 한 글자로 요약된다(凡兵之道 莫過於一 범병지도 막과어일).


 지휘권은 하나로 단일화되고, 병력은 하나로 집중되며, 군의 행동은 하나로 통일을 이루어, 장수가 자유자재로 작전을 수행할 수가 있어야 한다. 지휘권의 일원화가 곧 싸움의 승패를 결정한다.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진주대첩에서는 잘 알려지지 아니한 희생자가 한 명 있었다. 진주성의 영웅 김시민(金時敏)의 직속상관인 유숭인(柳崇仁)이 바로 그 희생자다. 


 진주성 밖에서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에, 이미 왜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유숭인이 말을 타고 달려와 김시민과 함께 진주성을 지키고 싶으니 성문을 열어 달라고 하였다. 단 한 명이라도 병사가 아쉬운 당시의 전황이었지만 진주 목사 김시민은 유숭인을 성안에 들이기 거부하였다. 왜 그랬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이러하였다. “이미 곳곳에서 격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판인데, 엄히 경계하여야 할 성문을 조금이라도 섣불리 열고 닫다가는 적군에게 창졸(倉卒: 어찌할 수가 없이 갑작스럽게 닥침)의 염려가 있는 것이니 밖에서 응원을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어 유숭인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실로 자기 상관인 유숭인이 진주성내로 들어오겠다는 뜻에 대한 김시민의 염려는 그가 들어오는 계기로 말미암아 명령계통에 혼란이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김시민의 조치는 분명히 심한 측면이 있었지만,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는 이 조치에 대해 “이러한 계책이 진주성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으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로다”라고 감탄을 하였다. 이 일은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나, 진주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분전(奮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왜군에게 대패하였다. 그 패배 이유 중의 하나가 성 안에 있던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과 의병대장 김천일(金千鎰)의 불화였다. 진주성을 지키는 작전 명령이 이미 흩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고, 목수가 많으면 집이 기운다는 말이 있듯이, 명령 체계가 이원화(二元化) 되면 승리를 적에게 헌납하게 된다고 손자는 말하였다. 싸움터에서의 명령은 절대적으로 장수의 주도하에 일원화(一元化) 되어야 한다. 


 명령권의 일원화에 문제가 되는 것이 임금과 장수간에 존재하는 권한의 한계성이다. 싸움의 중심은 장수라 하지만, 그렇다고 장수가 임금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제아무리 못난 임금이라도 임금은 임금이다. 장수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임금이다.


 임금은 정치적인 이유로 전쟁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장수는 군사적인 이유로 작전명령을 내린다. 임금은 현장에 있지 아니하기에 상황을 잘 모르면서 진격을 지시하고, 퇴각을 명령하는 경우도 많다. 또 장수는 임금의 뜻을 무시하고 월권행동을 하는 수도 있다. 


 여기에서 잠시, 한국동란 시기에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충돌 사건을 생각해 보자. 


 1951년 3월 10일 맥아더는 한국 전선의 제12차 시찰을 마치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국제적 결정이 없으면 한국은 침체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날 성명에서 그는 만주를 폭격해도 군사기지 시설에 한한 폭격이며 민간인 피해는 없을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1951년 4월 19일 오전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침략자 중공을 응징하자‘며 소신을 피력하였다.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그는 한국전쟁을 조속히 종결짓지 않으면 더 큰 전쟁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한국전의 조속한 종결을 위해 첫째로 압록강 피안의 적 보급기지를 폭격하고, 둘째로 중공에 대한 경제봉쇄를 실시하고, 셋째로 미 해군으로 중국 본토의 연안을 봉쇄하고, 넷째로는 공군으로 중국 본토를 공격하고, 다섯째로 타이완에 있는 국부군에 가해진 제한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4월 21일 인터뷰에서 "이러한 나의 주장을 가리켜 전쟁도발이라고 비난하는 일부 인사들도 있으나 촉발된 전쟁을 조속히 종결시키는 것이 군인의 사명일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부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당시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불신으로 인해, 한국 전쟁 후 미국에서 매카시스트 즉, 극단적 반공주의인 매카시즘 추종자로 낙인찍힌다.


 맥아더는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는 게 목표였던 반면, 트루먼은 정치가인지라 "제한전쟁"으로써 전쟁은 시작된 곳에서 맺어야 하고, 얼른 전쟁을 종결지어야 정치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의견차로 결국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 이후, 맥아더는 보급/충원의 근거지가 되는 만주에 항공폭격을 허가해 달라고 본국에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소련에 참전 빌미를 줘 확전되는 것을 우려하여 불허했다. 


 이런 기미를 눈치 챈 소련은 비공식적으로 공군조종사를 중국에 보내 한-만 국경에서 미군 폭격기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미국 국내에서 인기 없는 전쟁이었다. 기간이 길어지자 여론의 종전압력도 커졌다. 이로 인해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해임명령을 받은 맥아더는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마지막 말을 남기고 군복을 벗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왜장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온다는 첩보를 접했다. 그리고 이순신에게 가토를 잡아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잔혹성이 강한 가토는 조선인에게 가장 악질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 첩보가 왜군에게서 나온 것이라서 무턱대고 신뢰할 수도 없었거니와 경상도 곳곳에 웅거하고 있는 일본수군들이 더 문제였다. 배후 여러 곳에 숨어 있는 수군들을 두고 부산 앞바다까지 나갔다가는 자칫 포위를 당할 수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순신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가토가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다는 첩보가 다시 조선 조정에 들어왔다. 선조는 격노해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백의종군케 하였다. 명목상 “조정을 기만해 임금을 무시한 죄요, 적을 놓아 주어 나라를 저버린 죄”였지만 실상은 괘씸죄였다. 


 이후, 이순신 자리에 원균이 임명되어 싸움을 벌였지만 완패하고 자신도 죽음을 당했다. 이순신은 재등용 되었지만 모두가 상황을 잘 모르는 임금이나 조정이 장수의 권한을 무시하고 월권행위를 한데서 일어났던 사건들이다. (2017.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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