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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미두점(防微杜漸)
namsukpark

 

 삶에서 후회는 앞장서 찾아들지 않고 예외랄 것도 없이 맨 나중에서야 가슴 치게 만든다. 지난 세월을 한탄하기보단 지극히 작은(微) 잘못을 막아(防) 커지는 것을 미리(漸) 막는(杜) ‘방미두렴(防微杜漸)’의 자세로 열심이었으면 그 얼마나 좋았을 테다. 세상에 산 좋고 물 좋은 곳은 없다고 하지만, 햇빛에 쬐이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바라면 전설이 된다.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의 빛이 눈으로 나타날 뿐이다. 감나무가지에 까치밥을 남겨두는 것도 날짐승이나 다른 생명체의 먹잇감으로 남겨두는 배려이고 하나의 미덕(美德)일 테다. 모두 같이 삶을 영위(營爲)해가는 숭고한 뜻이 담겨있다. “배고픈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맛을 모른다!”고 했다. 우리 속담엔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고 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모든 것을 승자독식(勝者獨食)하면 결국엔 승자조차 멸망하게 됨은 너무나 자명(自明)한 일이기에 말이다. 


 잘 익은 홍시(紅枾)를 감나무가지에 까치밥으로 남겨놓으셨던 조상님들의 넉넉하고 훈훈한 마음씨가 그립다. 먹다 남은 음식물을 함부로 버리질 못하고, 밥 한 숟갈이라도 남은 것을 버리기 망설여지고 배꼽이 튀어나와도 남김없이 먹는 식습관의 잔재(殘滓)도 변명을 삼는 게 멋쩍긴 하다. 연례행사처럼 겪어야했던 춘궁기(春窮期)의 배고픔, 우리세대가 너나없이 감내(堪耐)해야 했던 그 어려운 시절이 알게 모르게 잊히질 않는 까닭이다. “인생을 등에 지면 무거운 짐이 되고, 가슴으로 안으면 사랑이 된다.”고 한다. 지금은 봄이 되어도 춘궁기라는 말을 새까맣게 모르고 지내지만, 숙명(宿命)처럼 찾아드는 계절의 아픔이었다. 


 고갯길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음은 당연하고 마땅하지만, 부동산 실(實)수요자들이 ‘미친 집값'에 숨죽이며 시세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 이제는 대세(大勢)하락에 대한 우려를 다독이고 있다. 부동산 버블(bubble)의 사전적인 정의는 ‘투자자들이 합리적인 기대에 의해 자산의 시장가격이 크게 상회하는 것’을 뜻하지만, 대개의 경우 결과론적(結果論的)인 측면에서 말을 아끼려들지 않는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부동산 불패(不敗)신화에 익숙하다보면 “최근 매매시장에서 벌어지는 ‘눈치싸움’이 버블의 전조(前兆)로 보일 순 있지만, 수요가 없는 부동산가격은 실체 없는 거품에 지나지 않다는 해석이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반드시 보상받는 건 아닌 줄 알고 기대감이 얼마든지 배신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認知)하는 것이라 한다. 세상만사에 ‘아니면 말고’하려드는 경우가 없을까만 견공(犬公)은 사물에 집중할 경우나 판단이 요구될 땐 좌우로 꼬리 흔듦을 멈추고 두 귀가 쫑긋해진다. 


 기술경쟁은 자동차 메이커의 일상이지만, 기술개발의 중요성은 한층 커지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가장 큰 기술 테마는 친환경차와 자율주행운전이다. 이산화탄소(CO2) 배출규제는 디젤의 질소산화물 규제와 함께 엔진이 주도하지 않고 배터리 전기차와 수소 전기차 등과 함께 150년 역사의 내연기관이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뵌다. 이미 대부분 자동차회사가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변화와 속도는 더욱 빨라져가고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의 역할만을 기다리는 게 의미가 없어진 제조사들은 상호 협력하여 자체적으로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加)할 수밖에 없고 관련 업계는 계속되는 혁신과 함께 선진 기술과의 통합을 요구받고 있다. 


 손오공의 분신술(分身術)인가 했더니만 세계 최초로 AI를 활용한 아나운서가 등장했다는 소식이다. 보도 내용에 맞춰서 표정과 음성까지 적절히 조절되기 때문에 사람 아나운서와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영상자료만 주어지면 어떠한 언어로도 방송기사가 전하는 내용과 분위기에 맞춰 마치 인간 아나운서처럼 전달이 가능하다는 AI아나운서는 365/7/24 실시간으로 쉬지 않고 방송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중심의 척도(尺度)에서 지각(知覺)할 수 있는 상황은 인간의 속도일 때, 사람과 동일한 수준에서 사물이 움직여야 그 사물은 감정과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마음’뿐”이 아닐는지…. 인공지능이라서 감정과 융통성의 한계가 있겠지만, AI가 점점 발달하고 고도화되면 스스로 생각하고, 창조적인 능력을 갖춰 자아(自我)가 생기게 되면 언젠가는 평등권을 주장할 테다.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가정한다면 인간의 존재가 위태로워지고, 마땅히 제어(制御)할 수없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가공(可恐)할 일이기도 하다. 미래를 미리 걱정하는 것은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야 할 경우를 앞당겨보는 모습이 한편 어쭙잖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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