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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64.끝)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그 해 겨울에 나는 파주에 있는 영어마을에 1달 영어마을 체험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책상에서 배우는 영어 말고 생활을 통해 배우는 영어는 쉽게 배우게 되지 않을까? 한 달간 그곳에서 먹고 자고 원어민 선생들과 합숙하면서 무조건 영어로 쓰고 살아야 한다.

등록금이 200만원이었는데 나는 여길 한번 보내면 아이가 영어에 친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큰 마음먹고 등록을 했다. 그렇게 그곳에 아들을 보냈는데 저녁마다 아들이 떠듬떠듬 한국말로 전화가 온다.

“엄마, 애들이 날 자꾸 놀려. 그리고 나랑 같이 안 놀아. 선생님하고 얘기해도 아무 소용없어.”

이미 짐작한 것이었지만 나는 너무 속상했다. 아들은 아직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 어눌하고 떠듬거리니 애들이 놀려대는 모양이었다. 그 후부터 나는 아들을 합기도 학원 외에 아무 학원에도 보내지 않았다.

아이한테 중요한 건 영어나 다른 공부보다는 우리말을 잘 배우는 것이 우선인데 나의 너무 앞선 조바심 때문에 돈만 낭비하고 아이에게 상처만 주고 힘들게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때부터 나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경쟁이 치열하고 교육 수준이 훨씬 높은 이곳에서 과연 우리가 얼마나 잘 적응을 해서 따라갈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가져온 성적증명서에는 수학, 영어가 50점 대였다. 나는 성적표를 보자마자 아들 등짝을 후려 갈겼다. 지금 그것을 너무 후회하고 있지만 말이다. 왜 이렇게 점수가 낮느냐는 나의 질문에 아들은 대답했다.

“난 수학이 재밌는데 선생님이 한국말로 설명하는 걸 못 알아 듣겠어.”

결국 언어가 문제였다. 모든 설명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수학, 영어가 50점대면 말을 다한 것 아닌가? 그리고 지금 중2에서 이 정도 점수면 고등학교는 더 따라가기 힘들 것이다. 과연 내 아들이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어떻게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런데 나에게 결정적인 결심을 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가 있었다. 나는 아들 학교에 교복 문제로 방문하게 되었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선생님들이 중국어로 서로 나누는 대화의 주인공은 뜻밖에 내 아들이 아닌가? 나는 귀를 곤두세우고 듣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내가 ㅇㅇ엄마인줄도 모르고 거리낌없이 말하고 있었다.

사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이들이 내 아들을 따돌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중국어를 다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선생들은 나중에야 내가 ㅇㅇ엄마임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큰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아이가 왕따나 당하게 하려고 남한에 온건 아닌데, 참 너무 속상했고 집에 와서 그런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는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들 성적이나 신경 쓰고 있었으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도 사실 너무도 살기 좋은 나라가 왠지 심심했고 심지어 답답함을 느꼈다. 처음 2년은 천국에 온 것 같이 좋기만 하였고 어딜 가도 경치가 좋고 탈북자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좋아서 사실은 불평을 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꿈은 중국어를 배웠으니 이제는 영어를 배워서 여행을 다니면서 영어로 마음대로 소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그런 쪽으로 도전 해볼만한 아무런 계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직업학교에서 컴퓨터 관련 교육을 마치고 서울경찰청에 중국어 통역사로 프리랜서로 일하긴 했지만 전문적인 직업은 아니어서 수입도 사실 불확실했다. 나는 1년 동안 많은 고민을 통하여 드디어 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 떠나자! 이곳에서도 우리는 어차피 이방인이다! 이방인으로 살 바엔 이민을 가자! 나는 드디어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다. 캐나다는 인구의 대부분이 전 세계 이민자들로 이루어져있어 우리가 중국에서 왔는지, 북한에서 왔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낯선 땅, 지구의 서반구 캐나다를 향해 별로 정리할 것도 없는 남한생활을 마감하고 이민의 길에 올랐다. 몇 년간의 어려움 끝에 이제는 캐나다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아들은 대학도 다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일도 하고 있다. 수학과 물리학에 재능이 많은 아들은 가끔 대학에서 친구들 튜터링도 해준다. 그리고 에너지 관련 분야의 공부를 거의 마치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 많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곧게 잘 자라준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너무 고맙다. 그리고 우리는 캐나다 생활을 너무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다. 또 이곳은 내 인생의 종착점이기도 하다. 이제 또다시 국경을 넘을 일은 없을 것이다.

태어난 고향 평양에서부터 시골 농촌과 해변 도시, 중국과 수많은 국경들을 넘고 또 넘으며 좀처럼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던 나는 드디어 이곳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려 한다.

 

 

마지막 글

 

사실 내가 나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동기는 캐나다 이민 수속을 하면서부터였다. 이민이 순조롭게 되지 않아 이리저리 꼬이게 되면서 세 번째 변호사를 고용하게 되었는데 그는 나에게 간단한 히스토리를 써오라고 했다.

나는 두 장 정도의 간단한 나의 이력을 써내려 가다가 그만 글이 엄청나게 길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이참에 차라리 내가 겪어온 모든 것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기억에서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을 것 같았다. 또한 아들에게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가 엄마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묘사하며 서술하다가 그때의 감정들이 자꾸 북받쳐서 갑자기 두통이 생겨나고 사실 정신적으로 너무 견디기 어려웠다. 마음속의 고통과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가 않아 또다시 파헤쳐지는 것이 두려웠고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탈북과정을 쓰다가 그만 멈춰 버렸다.

“나는 만약 옛날로 다시 돌아가 내가 겪었던 일을 다시 겪어야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나는 항상 지인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이 말을 꼭 덧붙이곤 했다.

그때로부터 7년이 지나서 어느 정도 정착이 되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있는데 대학에 다니고 있는 아들이 요즘 들어 부쩍 엄마의 지난 시절 이야기를 자주 물어본다. 나는 아들에게 조금씩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이제는 책을 완성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나 역시 이 글을 다시 돌이켜 읽어 보면서 잊을 뻔했던 그 사연들을 되살리며 초심을 가다듬기도 한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또 가정의 행복이 그저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지, 또 내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겪으며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서야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 이 책을 보면서 돌이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죽음이 눈앞에 닥쳐오고 삶이 끝장날 것 같은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모든 고난들을 이겨내 여기까지 오게 된 나의 경험들이 현재 좌절과 절망을 느끼며 심지어 삶을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안겨주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지금 우리가 끼니를 굶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원하는 걸 아무 때나 먹고 살수 있는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 전쟁과 기아에 시달려 사람들이 죽어가고 어린이들이 미처 피어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특히 북한은 내가 탈북 전부터 시작되었던 가난과 굶주림이 25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북한 인민들이 최소한 배고픔 만이라도 느끼지 않을 만큼의 세상이 올 그날이 과연 있을까? 지금의 체제로서는 참으로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북한에 있는 나의 형제, 친척, 친구들, 인민들도 나처럼 자유와 풍요로운 삶을 맘껏 누리는 그날이 오길, 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쓰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캐나다 토론토 한인뉴스 신문사 이용우 사장님과 많은 분들께 감사 드린다.

 

저자 김민주

2021년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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