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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3)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5. 신비로운 세계의 문을 열고

나는 가발공장에서 2달이라는 연습공 기간을 거쳐 어느덧 숙련공이 되었고 한 달에 400 위안이라도 힘들게 벌던 시절과는 달리 아들을 잘 돌봐주면서도 월 600~700 위안은 벌 수가 있었다.

오후 5시 유치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오면서 일감을 챙겨온다. 그리고 저녁 먹고 남편과 아이를 재우고 나면 밤새 라디오를 틀고 희미한 탁상 등 아래서 11~12시까지도 가발을 만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추위였다.

겨울에 난방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작은 방에 난로통을 들여놓고 톱밥(나무가루)을 연료로 사용했다. 톱밥은 열이 약하고 금방 식어갔고 그래도 일을 멈출 수는 없어서 담요를 무릎에 두르고 겨울 자켓을 걸치고 목도리를 두르고 엄지와 검지만 내놓은 채 장갑을 끼고 일을 해야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집안에서 입김이 하얗게 나왔고 양동이에 물을 담으면 집안에서 다음날 아침에는 꽁꽁 얼어버린다. 그리고 어그 부츠보다 더 두툼한 발목 부츠를 신어야 할 정도로 콘크리트 바닥은 차디찬 냉기를 뿜어댔다. 그래도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아들을 곁에서 잘 보살펴 줄 수 있음에 또 감사했다.

매일 밤을 지새우며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준 친구는 바로 한국 라디오 채널이었다. 그냥 아무 음악채널이나 막 돌리다가 우연히 한국 라디오를 접하게 된 순간, 마치 금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오직 밤에만 신호가 깨끗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밤엔 추운 것도, 힘든 것도 잊고 남한방송을 들으면서 그동안 알고 싶었고, 가고 싶었고, 듣고 싶었던 남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서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밤마다 라디오를 듣느라고 추위도 잊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일했다. 그때부터 나는 웃는 일이 많아졌고 외롭고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서서히 치유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일자리를 찾고 월셋방을 구해 놓고 나서 남편은 원래 일하던 가구공장을 그만두고 가까운 일본 가구공장으로 옮겨왔다. 그때부터 우리 둘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일요일, 공휴일도 쉬어본 적이 하루도 없었다. 음력 설에는 공장이 문을 닫아서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외에는 매일 일감을 집에 가져와서 밤을 새웠다.

우리는 정말 돈을 아껴 썼다. 먹는 것조차 가장 싸고 양이 많은 걸로 먹고 살았고, 그래도 아들한테만큼은 가끔 아이스크림이라도 부담 없이 사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또 가장 좋은 점은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내가 북한에서 왔다는 걸 모른다는 점이다. 그것이 정말 나를 편하고 안전함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는 점차 한국회사에 들어가면 지금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사람들은 내가 한국어를 할 줄 알면서 왜 굳이 가발을 만들고 있냐고 하면서 통역이나 다른 일로도 얼마든지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한국 회사에 가서 일하라고 떠밀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무턱대고 공장에 찾아갈 수도 없어 한참을 고민했다.

그보다 나는 남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그들과 대화도 나눌 수 있고 정말 친 혈육처럼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길가에 붙은 조선족 직업소개소 간판을 보게 되었다. 그때 그 지역에는 조선족 직업소개소가 정말 많았는데 대부분 한국 기업에 공인들의 취업을 연결해주는 소개소들이었다.

어느 날 나는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도시의 번화가에 자리잡은 조선족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나는 북한사람이라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한국 기업에 일자리 소개를 부탁했다. 정말 허름한 차림새의 남편과 아들, 그리고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 조선족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줌마. 한국회사에 들어가려면 한식을 잘해야 하는데 한식 할 줄 알아요?”

“한식이 무슨 말인가요?”

“한국 음식을 할 줄 아냐고요?”

“아, 난 한 번도 해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어요. 모르는데요.”

“아줌마! 북한에서 왔죠? 북한사람은 직업소개 안 해요. 언제 잡혀갈지도 모르고.”

나는 갑자기 얼어붙었다. 그리고 1초가 새롭게 그 자리를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난 그냥 막노동이라도 시켜달라고 간 건데 주방에서만 일할 수 있다고 하니 한식은 또 처음 듣는 단어였다.

큰 기대를 안고 갔다가 실망에 빠져 돌아오게 된 나는 그때부터 오직 한식을 배워야만 한다는, 어떻게 하면 한식을 배울까, 라는 생각에만 골똘해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가면 코리아타운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리로 가보면 한국 식당들이 많다고 알려줬다. 나는 날을 잡아 버스를 타고 코리아타운이 있다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는 정말 입을 딱 벌렸다. 정말 여기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한국어 간판들이 걸려 있었고 특히 식당들과 카라오케(그게 뭔지 몰랐음)들이 즐비했다.

여기저기 한 바퀴 빙 돌다가 한국책방이라는 간판에 눈이 번쩍 띄었다. 나는 책방으로 들어가 서재에 꽂혀 있는 책 제목 들을 대충 훑었지만 사실은 온 신경은 주인아저씨에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아니요. 난 연변에서 왔소. 전 주인이 한국인이었는데 나한테 팔고 한국에 돌아갔다오. 어디서 왔소?”

수더분하고 사람 좋게 생긴 주인아저씨의 눈빛은 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왔어요.”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연변이나 동북에서 왔다고 거짓말하면 그곳 지형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거짓이 탄로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연속 소설 “춤 추는 용사” 1부~7부작으로 되어있는 책을 빌렸다.

남한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TV로 임수경을 본 것이 전부였는데 내가 남한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세상에 너무 신기했다. 나는 밤새워 가며 책을 읽었다. 가발도 집어 던지고 집에 오면 저녁 먹자마자 책 7권을 며칠 안에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 책은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으로 파병되었다 돌아온 병사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소설이다. 책의 주인공은 베트남 전에 참전하였다가 수많은 모기와 벌레들 때문에 미군이 비행기로 뿌려댄 살충제(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말초 신경에 이상이 생겨 온몸이 춤추듯이 흐물거린다. 그래서 제목이 “춤추는 용사”였던 것이다.

그 책들을 다 읽고 난 나는 또 그 책방으로 달려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 책도 다부작 이었는데 딱히 몇 부까지인지 기억은 안 난다. 그렇게 주인아저씨와 안면을 익히게 된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참! 내가 이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혹시 북한에서 오지 않았소? 느낌이 책만 빌리러 온 것 같지 않아서 말이오.”

나는 정말 많이 당황했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북한사람들을 단번에 알아봤다. 절대 그들을 속일 수가 없는 것이 중국어 발음도 어눌하고 조선어 억양은 연변 억양도 아닌 함경도 억양이어서 숨길 수가 없었다.

“걱정 마오. 날 무서워하지 마오. 여기 북한 사람들 몇 왔다 갔소. 난 절대 남을 해치는 사람 아니오.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돕겠소.”

“북한사람들도 여기 있나요?”

“여기 꽤 있다오. 그들 모두 조선족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고 있어요. 월급은 좀 적게 받지만 그래도 주인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니까 괜찮다고 해요. 아줌마도 혹시 주방 일자리 찾으러 왔소?”

“네. 한식 배우러 왔어요. 한국회사에 취직하려면 한식을 알아야 받아준대요. 한식을 배우려면 한국식당 주방에서 배워야 한다는데.”

주인 아저씨한테 조금씩 경계심이 풀린 나는 은근히 그의 도움을 기대했다. 조선족이나 한국인이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나에게 그가 하는 말들은 모두 정말 쓸모 있는 좋은 정보들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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