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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26)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이왕 도적이 다 훔쳐가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데 던지고 깨부수기까지 하다니. 나는 그 순간 너무도 두려웠고 또 화가 났고 남편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아니 차라리 저러다가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미웠지만 그냥 참고 내색을 안 하고 살아줬더니 지금 적반하장이다. 남편이라는 사람의 존재는 나에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만 할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 날에는 세 번째 도적이 또 들었다. 더 이상 훔쳐 갈 것이 남아있지 않아서 도적이 안 오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아기 옷까지 훔쳐가고 심지어 숟가락과 밥그릇까지 다 가져갔다.

“아이고야, 이불까지 다 뜯어가고…….” 엄마는 대성통곡을 한다. 너무 슬피 우니 주변에서 누가 죽은 줄 알고 고개를 기웃거린다. “00야 엄마가 준 세타까지 몸에 걸칠 거 하나 없이 다 도적 맞혔구나.” 마침 둘째언니까지 달려들어 도적이 든 것이 내 죄인냥 나를 몰아세운다. 어른들의 구박 소리에 아기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는 기가 막히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마지막 남은 인내심도 사라졌고 자존심마저도 무너져 내렸다.

 몸에 걸친 옷말고 남은 것도 없으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두 눈을 퍼렇게 뜨고 코를 베어가는 무서운 세상이다. 나는 그날 밤 꿈을 꾸었는데 내가 사는 집 천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 꿈이 너무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나는 친정집에 놀러 온 엄마 친구 분한테 꿈 이야기를 했다. 그 선생님은 신기가 있었는데 그가 예언하는 일은 모두 정확했다. 그는 도적이 세 번이나 들었으니 이미 불행한 징조가 시작되었고 거기에다 가 천정이 무너지는 꿈은 2~3일 내로 그곳을 떠나오지 않으면 큰 변이 생길 징조라고 당장 그 집에서 나오라고 했다.

 드디어 나는 오랫동안 고민했던 생각에 대해 결심을 내렸다. 남편에게는 집 계약이 끝났으니 더 이상 이사 갈 집도 돈도 없고 각자 부모 집에 옮겨 가서 알아서 살아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서로가 부담을 주거나 받지도 말며 굶어 죽지 말고 당신 몸을 챙기고 잘 살아가라고 당부하고는 돌아섰다. 도적을 3번이나 당하고 또 남편한테까지 홀대를 받게 되니 그때부터 항상 당돌하고 강인했던 나의 자긍심과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져 버렸고 삶의 의욕마저 사라져 버렸다.

 예전에 그토록 총명하고 긍정적이고 항상 의지가 넘치던 나의 모습은 간데없고 초췌하고 눈동자는 초점이 없어지고 기억력이 사라지고 사실상 반 정신이 나가 있었다. 또한 사물 판단을 할 수 없을 만큼 멍청해지고 상대방의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으며 엉뚱하게 동문서답을 해 식구들이 놀랄 정도였다. 아기를 업고 찾는다! 한번은 친정집에 가려고 밖으로 나서 걷 다가 갑자기 자고 있는 아기를 집에 두고 온 생각이 났다.

 “아이쿠! 내 정신봐라”나는 얼른 아이를 업고 가려고 집으로 총총 뒤돌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집안에 들어와 보니 아무리 둘러봐도 아기가 없었다. 아니 이젠 하다하다 아기까지 훔쳐 갔단 말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나는 허둥지둥 장롱, 이불장까지 문을 열고 뒤졌고 순간 머릿속이 갑자기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창 난리를 치는데 갑자기 등 에서 잠결에 꼼지락거리는 아기의 움직임을 느꼈다. 사실 나는 아기를 업고 찾고 있었던 것이다. 아기를 업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나는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제4생사를 넘나들며

1. 유랑의 길에 오르다

 1997년 여름 7월. 이때가 바로 최악의 고난의 행군의 정점을 달리던 시기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으며 또 탈북을 했는지 그 숫자는 정말 헤아릴 수 없었다. 이제부터 진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갈라져 친정에서 두 달 정도 살던 나는 아무래도 어디론가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기 젖을 먹이고 나면 금방 배가 고플 거라고 나한테만은 배곯지 않게 하려고 애쓰셨는데 그런 것들 때문에 부모님과 아픈 동생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짐을 안겨주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죄송스러웠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각자 알아서 살자고 이별 아닌 이별을 한 남편이 매일 친정집에 찾아온다. 자기 엄마와 누이들과 함께 살면서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는 모양새였다. 내 친정에 오면 그래도 저녁은 먹을 수 있으니 거의 나와 아이 핑계를 대고 오는 것인데 나는 그것이 너무 싫었다. 나는 그 남자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친정에 얹혀사는 것도 미안해 죽겠는데 시집식구들의 소원대로 남편을 돌려보냈으면 알아서 살아야지 뭣 하러 매일 온단 말인가?

 나에게는 그는 이미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친정 부모들이 아픈 남동생도 있는데 나와 아기까지 챙겨줘야 하고 거기다 제일 젊고 건장한 남보다 못한 사위까지 돌봐야 한단 말인가? 내 부모들께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친정집을 떠나야 남편이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며칠을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나는 드디어 집을 떠나서 아무 데라도 발 이 닿는 대로 아기와 함께 살아갈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아무런 대책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엄마한테 거짓말을 했다. 친구가 방 한 칸을 세를 준다고 하는데 거기 가서 그 친구와 함께 떡장사라 도 할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엄마는 나를 절대 못 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

다. 엄마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한편으로는 걱정을 하셨다.

 “아기를 데리고 무슨 장사를 한다고 그러니? 애가 2~3살 넘을 때까지 여기 그냥 눌러있으면서 나랑 같이 장사하면서 살면 안되겠니?” 나는 사실 남편 때문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시간이 흐르면 결심이 흔들릴까봐 그날 중으로 집을 나섰다. 내가 집을 떠날 때는 아버지가 대장염 때문에 며칠을 누워 계셨는데 나는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나왔다. 엄마는 대문까지 바래다주면서 너무 힘들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집에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나는 곧 돌아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과연 언제 다시 집에 돌아와 부모님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으로 본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다. 나는 그때 그렇게 헤어진 것이 부모님들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나는 사실은 살길을 찾고 나서 자리가 잡히면 한 달 정도 있다가 돌아올 생각으로 가볍게 집을 떠났다.

 대문까지 바래주는 엄마를 뒤로 하고 대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떤 커다란 재앙이 눈앞에 닥쳐오고 있음을 전혀 알 수 없는 채 말이다. 집을 나올 때 내 둘째 언니는 나를 입으라고 자기 옷가지 몇 벌 그리고 여름 신발 가지고 가라면서 건네줬다. 나는 그것들을 챙겨서 무작정 기차 역전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에 나는 남편에게 편지를 짧게 한마디 남겼다.

 “내가 어디를 가던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세요.” 그렇게 나는 8개월된 아들을 업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목표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집을 나와 버렸다. 한 시간 반 정도 걸어가는 동안에 나는 청진에 갈까 아니면 혜산으로 갈까 아니면 신의주 쪽으로 갈까 하고 고민했다. 혜산이나 신의주는 국경 지대라서 혹시라도 기회가 되면 중국에 쉽게 건너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고 청진에는 사촌언니가 있어서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일단 2시간 가까이 걸어서 시에서 제일 큰 장마당으로 가서 들고 나온 짐이 될 만한 무거운 물건들은 다 팔아버렸다. 이불과 언니가 준 옷가지들도 말도 안 되는 싼값에 팔았다.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며 뭘하고 살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영혼 없는 발걸음으로 시장바닥을 스적스적 걷고 있는데 바로 내 눈앞에 접혀진 돈이 40원 정도가 땅에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떨어진 돈의 위치는 물건 파는 어떤 아낙네의 등 뒤에서 두 발짝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얼른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이 돈의 존재에 대해, 또 나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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