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13 전체: 80,970 )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20)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나도 울었는데 슬퍼서 울었는지 아니면 이 나라가 갑자기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 친구도 귓속말로 나한테 속삭였다. “나 눈물이 말랐나봐. 눈물이 안 나와 어떡하지?” 김일성 서거 애도기간에 자칫 실수를 해서 해임 철직된 간부들이 많았다. 동상에 앞장서서 안갔거나 아니면 집에서 술을 마셨거나 생일에 지인을 초대했다거나 이런 소문이 보위부 귀에 들어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소문에 누가 잡혀가고 누가 끌려가고 누구는 해임되고, 농촌이나 광산마을로 쫓겨나고 온 나라가 뒤숭숭하였다.

 김일성이 가고 새로운 김정일 시대가 오면서 공포심을 심어주고 철저히 통제하려는 것이다. 외신은 김일성 사망 애도 장면을 보여주면서 ‘종교집단의 집단적 히스테리’라고 멘트를 날렸다. 자기 부모도 아니고, 지도자 죽음 앞에 전체 인민이 몸부림치는 모습은 외부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얼마나 우리가 세뇌되어 있는지, 세뇌의 농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1일 애도기간 우리는 매일 김일성 동상에 꽃을 드리러 갔다. 나중엔 꽃이 없어 야생화를 찾아 산과 들판을 헤메였다. 텃밭의 호박꽃, 줄당콩 꽃까지 꺾어갔다. 김일성의 장례식은 11일 후에 발인했는데 그는 금수산 의사당에 잠자는 모습으로 안치되어있다. 그렇게 김일성 시대는가고, 김정일 시대가 왔다. 김일성 말년부터 김정일은 김일성과 동급으로 장군이란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원래 장군이라 함은 군사에 능통하고 전쟁이나 싸움 또는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거나 지략이 뛰어나고 군대를 능숙하게 진두에서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한테 주는 칭호인데 갑자기 김정일을 장군이라고 부르니 좀 생뚱맞았다.

 그 외에도 ‘만민의 어버이’, ‘불세출의 위인’ 등 그의 이름 앞에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엄마는 불만을 터뜨렸다. “총도 한 방도 안 쏘 본 놈이 장군은 무슨 장군이야? 지가 전투를 해봤나, 전쟁에 나가봤나” 엄마의 불평불만은 갈수록 늘어갔고 더욱 위험수위가 높아져 갔다. 세상이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졌다고 생각한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보위부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우리 온 집안 식구가 깊은 산골짜기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갈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다.

 우리는 김일성 시대는 그나마 살만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김일성 사망 후부터는 급격히 국가가 인민에게 식량을 공급하지 못하면서 암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원료, 자재, 전기가 부족해 공장은 멈췄다. 농사는 갈수록 흉년이 들었고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씨가 말라갔다. 사람들은 굶어 쓰러지기 시작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알 수 없는 행방불명의 사람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4. ‘사흘 굶으면 도적이 된다’

 위에서 김정일의 지시가 내려왔다.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므로 모두가 불평불만이 없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쌀을 줄 수가 없으니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이 항일 전쟁 때 일본군에게 포위되어서 산속에서 고립되어 갖은 굶주림과 추위와 일본군의 추격에 식량 공급이 끊겨 40여일 가량 나무껍질과 풀뿌리 캐 먹으면서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냈던 시기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김일성 빨치산이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속에서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삶아 먹고 풀뿌리로 끼니를 떼우면서도 정신적으로 굴하지 않고 버텨낸 것처럼 전체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난의 행군’을 걸어야 한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식량배급이 완전히 끊기고 사람들은 자체로 먹거리를 마련해야 했다. 국가가 뭘 주기를 바라다가는 자기 목숨을 잃는 것밖에도리가 없다.

 사람들은 쌀을 구하러 유랑길에 올랐다.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목숨 가진 사람들은 다 기차에 매달렸다. 기차 안은 사람이 꽉 들어차고, 지붕까지 사람들이 하얗게 올라가 있었다. 열차 지붕 위에 기어 오른 사람들은 기차굴을 지나갈 때 허리를 숙이지 않아 치어 죽거나, 전기 고압선에 감전되어 죽은 사람들도 허다했다. 심지어 승강장과 기차 밑 공구통에까지 사람이 매달려 있다.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고 나라가 해방되면서 사람들이 증기기관차에 하얗게 매달려 돌아오는 풍경과 꼭 같았다. 다만 굶주린 인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떠나는것만 다를 뿐이었다. 짐짝 쌓듯 사람 위에 사람이 쌓이면서 먼저 오른 사람들은 기차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기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창문유리를 깨고 그곳으로 오른다. 내릴 때조차 기차안 통로를 다닐 수 없어 창문으로 내려야 한다.

 1996년, 나는 두 언니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려고 기차에 올랐다. 서해안의 염전에서 소금을 사서 동해안에 갖다 팔면 이윤이 남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많은 사람들이 창문으로 오르고 내렸다. 하지만 우리가 앉아있는 옆쪽의 창문 곁에는 도저히 사람들이 오를 수 없을 만큼 빼곡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3명의 군인들이 발 디딜 틈이 없는 열차 창문을 강제로 올라왔다. 그리고 발을 디딜 틈조차 없자 사람들의 어깨와 머리를 마구 짓밟으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어떤 아줌마가 머리가 밟히게 되자 마구 비명을 지르면서 왜 사람을 마구 짓밟고 다니냐고 소리쳤다. 하지만 새파랗게 젊은 20대 초반의 군인들은 짐보관대를 잡고 공중에서 그 아줌마를 군홧발로 내려찍고 사정없이 구타했다. 사람들이 무서워서 자리를 비키면서 공간이 생기자 군인들은 더욱 날뛰었다. 그들은 의자와 의자 사이를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폭행했다.

 무심한 열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고 갑자기 열차 안은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들의 입에서는 쌍욕이 그칠 새 없었다. “이 쌍간나, 이 간나가 함부로 장군님(김정일)의 군대보고 뭐 어쩌고 어째?” 그 아줌마는 비명도 못 지르고 기절을 해버렸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격분에 몸을 떨고 분노의 눈길을 주고받으면서도 저지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다 못한 옆의 한 아저씨가 그들을 만류하자 이번에는 사냥감을 발견한 이리떼처럼 그 아저씨를 얼굴을 올려 치고 주먹으로 때렸다. 그 아저씨 입에서 피가 마구 흘러내리고 어금니가 빠져서 튀어나왔는데도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젠 그만하면 안되겠소? 그러다가 살인나겠소. 장군님의 군대는 사람을 죽여도 되는거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한마디 하자 이때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저마다 분노와 비난을 퍼부었다. “미친놈들 아니야? 군대가 벼슬이야? 일본놈보다 더 하구만” 그제야 그 세 놈은 구타를 멈췄다. 이때 어떤 건장한 아저씨가 나서서 말했다.

 “야! 너희들 어느 부대야? 부대이름하고 부대장 이름을 대봐. 너네 두 새끼다 강제로 제대하기 전에 당장 그만해. 참자 하니까 이것들이 장군님 이름을 팔면서 사람들 패고 다니고 있어. 너희들 진짜 군대 맞아?” 갑자기 그 세 놈은 슬그머니 어디론 가 사라져 버렸다. 장군님의 군대가 인민을 위한 군대가 아니었던가? 언제부터 이 나라의 군대는 김정일의 똘마니, 아니 폭도로 변했던가?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하면서 인민군대를 ‘나의 군대’, ‘나의 병사’라고 불러주면서 ‘인민의 군대’는 ‘장군님의 군대’, ‘장군님의 병사’로 위상이 올라갔다. 김일성 시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인간은 육체를 보존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면 인간성은 사라진다. 군부대의 식량 사정도 악화되어 감에 따라 배고픔에 견딜 수 없었던 군인들은 포악한 강도무리로 변해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관들의 민간에 가서 쌀이나 짐승을 훔쳐오라고 하는 지시를 거역할 수도 없을 뿐더러 장기적인 굶주림에 그들도 악이 받칠 대로 받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군부대 근처에 있는 마을에 쌀이나 옷, 기르던 돼지나 개 등, 심지어 구루마, 바께쓰. 가마솥 등등 팔아서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은 다훔쳐갔다. 그리곤 헐값에 먹을 것과 바꾸어 먹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배고픔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