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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19)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기중기 없이 5-7층 아파트를 건설하는데 시멘트부터 브로크까지 인력으로 올린다. 남녀 할 것 없이 1층이 완성되면 2층, 3층, 이렇게 시멘트 브로크를 ~3~4장씩 등에 메고 계단을 오르며 날라간다. 하루 종일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브로크를 나르고 나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걸을 수가 없다. 때로는 뜨거운 여름철에 집짓는데 필요한 기초돌을 채취하러 채석장에 간다. 채석은 커다란 위험을 수반한다. 큰 바윗돌에 정대로 구멍을 뚫어서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젖은 진흙으로 덮은 뒤 도화선에 불을 단다.

 한 사람이 담뱃불로 도화선에 불을 달고 뛰어내려오면 각자 알아서 숨을 곳을 찾아서 숨어야 한다. 때로는 다이너마이트가 양이 너무 많아서 산이 전체가 진동하고하고 숨어 있는 곳까지 돌들이 튕겨 날라올 때도 많다. 아슬아슬하고 무시무시한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큰 돌을 깨서 들어 올릴 수 있는 크기로 만들고 여자들은 트럭이 오면 무거운 돌을 안고 들어서 실어야 한다. 하루 종일 무거운 돌을 들어서 차에 싣고 같은 일을 몇달씩 반복하다 보니 원래 않 좋던 허리통증 때문에 정말 고통스러웠다.

 노동현장에서 여자라고 쉬운 일을 가려할 수 없다. 남자와 꼭 같이 해야 한다. 여자도 남자와 같은 양의 식량 배급을 타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시멘트나 진흙 몰탈을 이기는데 힘들어하면 꾀병을 쓴다고 구박하거나 인격적, 신체적 모욕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엊그제 학교 졸업하고 온 어린 여자애들도 예외는 없다. 북한은 가부장적 사회이다. 남자가 여자한테 욕을 퍼붓고 구박을 하는 것은 남자의 권력으로 당연시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말대답질을 하거나 대들면 시집가서 며느리 구실을 못할 여자라는 평판이 따라붙기 십상이기 때문에 억울하고 분해도 참아야 한다.

 전근대적 노가다판이었지만 때로 즐거움도 있었다. 채석장은 바로 바닷가 옆이라 가끔은 한두 명 시켜서 낚시를 시켜 점심 시간에 어죽을 끓여 먹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모두가 신나서 들떠 있다. 큰 가마솥과 함께 각자 감자나 쌀, 소금, 등 심지어 술도 준비해온다. 방금 낚시로 건져 올린 생생한 물고기로 바닷가에서 어죽을 끓여 먹으면 그 시간은 천국에 와 있는 것 같다. 평소보다 점심시간을 더 오래 쉴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보다 어죽 맛이 정말 황홀했다.

 북한에서는 맛없는 음식이란게 없다. 만성적인 가난과 결핍상태에서 먹는다는 그 자체가 감미로웠던 것인가, 그보다 인공 조미료와 첨가물이 없는, 자연상태 음식이어서 맛있었던 것 같다.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도 북한 음식이 맛있다고 입을 모은다. 나뿐만 아니라 탈북자들도 같은 생각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중국이나 남한에서 나는 북한 음식의 진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우리 직장은 기업소의 모범이었다. 체육, 서클, 어떤 경연을 하던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먹을알 있는 직장이다보니 직장 간부들의 자신감과 승부욕은 충만했고 재능 있는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매일 아침 종업원이 모여 아침체조를 하고 사상무장 학습도 진행한다. 어느해부터인가 당국은 전체 인민에게 태권도를 보급하였다. 태권도를 배우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장, 단위별로 경연을 벌인다.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 생일 때마다 직장별 예술 경연을 벌인다.

 종업원 전체가 모여 합창부터 종목별로 연습하는데, 노래와 내용은 수령숭배와 수령일가 찬양일색이었다. 이때만큼은 남자들은 양복에 흰 셔츠를, 여자들은 화려한 저고리를 입고(남의 옷을 빌려서라도) 무대에 서는데 결혼할 때 입었던 옷을 한번 꺼내입는 격이 된다. 직장에서 얻는 성취도 사회인에게 중요하다. 위에서 시키는대로만 복종하는 삶을 살아오는 탓에 자존감을 느끼는 계기란 직장의 모범으로 평가받고 군중 앞에 내세워지고, 뭇시선이 집중될 때이다.

 충성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1987년 3월, 먼 바다로 명태 잡이를 나간 원양어선이 침몰되어 60여 명의 선원 모두가 사망하는 큰 사고가 일어났다. 그들은 마지막 무전으로 김일성과 김정일 만세를 보냈고 모두가 선원실에 걸려 있던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를 물이 새어들지 않는 비상함에 넣어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시신이 서로 흩어지지 않게 서로 다리와 다리를 묶었다. 그렇게 묶인 시신들은 훗날 러시아 구조선에 의해 일부 건져졌는데 러시아 선원들은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를 가슴에 껴안은 채 굳어진 시신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들의 사례는 노동당 역사 문헌에 기록되었고, 배 선장과 무전수 겸 세포 비서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나도 충성분자로 선발되었던 적이 있다. 김일성이 기업소를 방문하고 남긴 어록을 화강석에 새기는 작업에 평소 일 잘하고 모범적인 여성노동자들을 선발하는데 내 이름도 있었다. 길이 20미터, 높이 3미터가 넘는 대형 화강석에 망치로 정을 두드리며 글자를 새기는 작업이었다. 붙여놓은 글자획을 따라서 쪼기만 하면 되지만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고도의 정신을 집중하되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해야 했다. 쇠망치로 정을 내려치는 쨍쨍한 소리는 하루 종일 귀를 아프게 했고 수십 명이 동시에 쩅쩅거리는 소리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져왔다.

3. ‘어버이’ 김일성의 사망

 김일성은 인민의 수령이며, 인민은 수령의 자식이었기에 인민에게 가장 친근한 김일성의 호칭은 ‘어버이수령님’이다. 김일성은 만주벌판에서 일제와 싸워 빼앗긴 나라를 찾아준 해방의 은인이며, 인민의 삶을 책임지고 돌보는 가족국가의 가장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배운 말은 아버지, 엄마, 다음에 ‘김일성원수님 고맙습니다’였고, 처음으로 배운 노래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였다. 우리는 개별적 인격체가 아니라 김일성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김일성이라는 반신반인을 구성하는 요소로 존재했다.

 1994년 그해 여름은 정어리, 청어를 비롯한 등푸른 생선이 많이 잡혔다. 7월 9일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특별방송이 있다며 12시까지 강연회실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이라는 지시가 내렸다. 나는 늦게까지 일하다가 좀 늦어서 특별방송을 듣지 못했다. 특별방송이 끝나고 탈의실에 돌아온 여자들의 얼굴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모두 말 한마디 없이 침울하고 감히 아무한테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조용히 물어보니 김일성이 7월 8일에 서거했다는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듣고 왔다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믿을 수가 없었다. 김일성의 나이가 84살이었는데 한 번도 그가 사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야 비로서 김일성이 신이 아닌 인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김일성은 철저히 신격화 신조화 하기 위한 우상화에 세뇌당해온 우리로서는 정말로 노랫말처럼 “하늘땅 끝까지, 해와 달이 다하도록 모시는” 불멸의 존재로 믿어왔다. 순간 떠오른 생각은 ‘김일성이 죽었으니 혹시 조국이 통일되는 건 아닌지? 아마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였다.

 내 생각을 알기라도 할까봐 얼른 주위를 살폈다. 우리의 수호신이었던 김일성이 죽었으니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아버지 김일성의 사상과 충성심이 온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던 우리로서는 김일성이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잘 받아들 여지지 않았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온 나라가 슬픔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바로 그날 오후에 우리는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각 지방에 있는 가까운 김일성 동상이나 강연회 실이나 현지교시판이나 할 것 없이 김일성의 사적물이 있는 것으로 파도처럼 달려갔다.

 시내 중심에 있는 김일성 동상 앞에는 벌써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수령님”을 목청껏 부르면서 목 놓아 우는 사람들과 심지어 폭풍 오열하다가 기절해서 들것에 실려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땅을 치고 가슴 치며 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은 울음이 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울지 않으면 괜히 반동으로 몰릴까봐 눈물을 흘리는 척하는 이들도 많았다.  (지난 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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