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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8)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서로 그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보려고 발을 동동 글렀고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으며 헤어졌던 한 형제, 한 핏줄을 만나듯이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때 유행하던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는데 임수경은 북한 대학생 대표들과 합창으로 이 노래를 부르면서 함께 울기도 했다. 아니 우리 모두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통일 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 되면 북한도 남한과 같이 잘살게 되겠지. 우리 모두가 바라는 마음이었다.

 임수경은 돌아갈 때는 판문점을 통해 남한 땅을 넘어갔다. 음에는 승인이 되지 않아 실패하였고 두  번째 만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 신부가 그를 데려가기 위해 판문점까지 마중 나왔다. 카메라를 멘 기자들과 수많은 환송군중이 판문점에 모였다. 생중계를 잘 안 하는 북한이 이례적으로 임수경 귀환을 생중계하였다. 임수경이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고 판문점을 넘어가자마자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가는 것까지 TV로 나왔다.

 그가 감옥에서 수기와 편지도 쓰고 있다는 소식이 신문기사로 실리면서 또 한번 놀랐다. 만약 북한 같으면 바로 처형했을 것이다. 그 당시 임수경은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임수경이 통일 영웅으로 간주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외에도 신상옥 최은희는 재북시 영화를 통해 분단으로 단절되었던 우리 민족의 근대문화 명맥을 잇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남한의 영화감독 신상옥, 최은희가 월북(사실상 납치)을 했다며 대대적인 뉴스로 나왔는데 그들이 만든 영화는 북한에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들이 만든 영화는 딱딱하고 사상적인 북한영화와 다르게 자본주의적인 색채가 풍겼고 남녀 간의 사랑도 적절하게 잘 묘사해주어 특히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북한영화는 남녀가 손을 잡는 장면조차 없지만 신상옥, 최은희의 영화들은 과감하게 키스하는 장면도 우산으로 가려주는 식으로 나오기도 했다.

 신상옥이 운영하는 신필름 영화가 나왔다고 하면 동네 영화관은 사람사태가 나고, 치열한 영화표 구매 전쟁이 벌어졌다. 신필름영화 촬영소의 영화 포스터들이 영화관에 나 붙은 순간부터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우리는 영화표를 구하려고 뇌물도 갖다 바쳐야 했고 하다못해 숙제를 해준다거나 간식거리라도 갖다 줘야 표를 손에 가질 수 있었다. 영화관 매표구 앞에는 사람 위에 사람이 걸어 다닐 정도로 피난민 행렬이 따로 없었다.

 가장 인기 있었던 영화는 바로 신필름 영화사의 “홍길동”이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촬영기술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만큼 재미있었다. 또한 영화 “소금”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러 항일하러 떠나는 모습이 “희망가” 노래의 배경 음악과 함께 나오는 장면이 뇌리에 박혔다. “희망가”는 일제 시기에 지어진 노래였지만 당시 북한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 같이 가슴에 와 닿았고 지금도 그 노래를 듣기를 좋아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은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그리고 최서해의 단편소설 “탈출기”를 신상옥이 영화로 각색한 “탈출기”는 마치 그때의 북한사람들의 생활형편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제2도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1. 보초병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엄마는 자신처럼 교육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공부는 그중 잘한 편이라 나한테 기대를 하셨지만 나는 정말 대학에가고 싶지 않았다. 또 교육자는 더더욱 되기가 싫었다. 부모님이 평양에서 명문대학을 나왔지만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한의 지식인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았다. 오히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군대나 보위부, 노동당의 권력기관에 있으면 대학을 몇 개 졸업한 사람들보다 더 으리으리하게 잘 살 수 있다.

 나는 가난한 지식인이 되기 싫었기 때문에 일부러 수업시간에 잠을 청하고, 숙제도 하지 않으면서 공부를 태만했다. 성적이 떨어지면 엄마가 대학을 가라고 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학급에서 등수가 점점 뒤로 밀리게 되자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고 대학은 가지 않더라도 공부는 제대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해마다 7월에는 각 시, 군별로 대학입학 지망생들이 대학 입학 추천서를 받기 위한 시험을 치르는데 여기서 등수권에 들면 희망대학에 갈 수 있는 추천권을 받을수 있다. 우리는 시에서 거의 2천명 정도가 모여서 대학 입시를 치렀다. 시험이란 원래 그렇듯이 긴장을 한 나머지 평소에 알고 있는 문제들도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서 기대했던 것보다는 시험을 잘 치르지 못했다. 2천여명 중에서 300등까지만 대학입학추천서를 받을 수 있다.

 1주일 후에 등수를 발표했는데 나는 겨우70등 안에 들었다. 1등~10등까지안에 든 학생들은 김일성 종합대학, 김책공업대학, 등 일류대학들에 갈 수 있으며 나머지는 지방대학에나 갈 수 있었다. 내가 시험 보러 간 교원대학은 우리 시에서 나를 포함하여 10명이 추천서를 받았는데 5명만 합격시킨다고 했다. 추천받은 대학에 가서 또다시 입학시험을 치르는데 나는 내가 절대 합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시에서 온 10명 중에는 시행정위원장 딸, 시당비서 조카, 도 과학원 원장 자녀 등등 평범한 교원의 딸은 달랑 나 혼자 뿐이었다.

 사흘 동안 대학교실에서 먹고 자면서 시험을 치르고 5일째 되는 날 합격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기대했던 대로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떨어져서 너무 기뻤지만 엄마는 너무 실망하고 속상해하셨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몇 달을 집에 놀아야 했다. 북한에서는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남자는 무조건 군대에 가야 한다. 여자들은 군대에 가는 것은 선택이고 대학에 못 가면 자동으로 아버지 직장에 취직이 된다. 나는 아버지 직장에 이미 언니 둘이 일 다니고 있어서 온 가족이 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엄마와 함께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곳에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데 바닷가 옆에 군부대 산하 수산사업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을 지나게 되었다. “엄마. 난 저런데 취직해서 보초병이 되면 좋겠어! 군부대 기업이니까 혜택도 좋고 수산물도 먹을 수 있고 일도 힘들지 않아서 좋잖아” 군복을 입고 총을 메고 하루 종일 정문을 지키는 일은 많은 여자들의 로망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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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33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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