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44 전체: 80,944 )
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조직생활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진행한다. 우선 일주일에 한번씩 생활총화를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일주일간 나는 어떤 결함을 범했는지 자아비판을 한 후 누가 공부 시간에 떠들고, 숙제를 해오지 않았으며, 등등 타인의 결함을 지적하는 호상 비판을 한다. 또한 조직생활에서는 사상무장 학습을 중심에 둔다. 학습회, 수업 시작 전 독보회, 문답식학습경연 등의 방법으로 김씨 일가의 역사와 혁명사상을 공부한다.

 다음으로 조직생활은 ‘좋은 일하기 운동’이기도 하다. “꼬마계획” 수행 등의 명목으로 각종 노력동원과 할당된 자금 및 재화를 내야 한다. 매일과 또한 1년에 두 번 나라에 바치는 “꼬마계획”을 수행해야 한다. “꼬마계획”은 청소년들이 노동당과 김일성의 외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충성 자금이다. 1년에 토끼 가죽 2장씩, 고철, 파지, 파동, 플라스틱 등등 온갖 파 자재들을 모아 수매소에 가서 수매하고 영수증을 받아 학교에 바쳐야 한다. “꼬마계획”과제는 범위가 제한되지 않았다. 위에서 수집항목을 내려보내는데 따라 매해 추가되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역삼씨(대마씨, 당시에 그것이 대마인지 몰랐음)를 1인당 1~2kg씩 채집하여 학교에 바쳐야 한다.

 북한에는 길거리나 산기슭, 또는 들판에 역삼(대마)가 참 많았는데 씨를 훑어서 깨끗하게 말려 학교에 바친다. 북한에 있을 때는 역삼이 어디에 쓰이는지 전혀 몰랐는데 나는 나중에 남한에 와서야 그것이 대마초인지를 알게 되었다. 정해진 수량이나 무게를 채우지 못하면 충성심이 부족한 학생으로 평가되며 일년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때 제일 힘든 것이 바로 토끼 가죽 2장씩 바치는 것이었다. 나는 해마다 계획 완수를 못했으며 우리집은 형제 4명이 일 년에 8장의 토끼 가죽이 필요했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나는 비판대상이 되었고 조직의 지시에 불복종하는 문제아로 찍혔다. 또한 교육을 실천과 결합한다는 의미에서 사회활동 참여를 독려하는데 그 의미는 소년노동으로 변질되었다.

 방과 후에는 학교에 모여 주변 농장이나 건설장에 동원되어 노동을 한다. 노동도구로는 삽이나 낫, 호미, 대야(소래 라고 함)를 가지고 주변 농장이나 관개 수 작업장에 가서 땅을 파고 흙을 소랭이에 담아 나르거나 밭일도 한다. 하루 평균 하루 20km 이상 걸어 다니는 것은 일상이었다. 날이 어두워져야 일이 끝나며 집에 도착하면 저녁 7시가 다 된다. 학교교육은 사회교육, 가정교육과 결합되어 진행하게 되어 있다. 사회교육에는 문화생활, 법무생활 등도 포함되는데, 법무생활 교육의 일환으로 학교 전체가 공개총살을 목격한 것이 있었 다.

 내가 13살쯤 되던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서 수업을 중지하고 모든 학생들이 30분 이내로 10km 거리에 있는 바닷가 솔밭에 모두 모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얼른 그곳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벌써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군중이 하얗게 모여 있었다. 바로 앞에는 책상과 마이크가 놓여 있었고이어 방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살인자 ㅇㅇㅇ의 인민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죄수는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19살 된 처녀를 유괴하여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목을 졸라 죽였다. 한때 소문이 나돌아 들은 적이 있는 사건이라 처음으로 보는 공개 재판에 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제일 앞자리에 섰다. 얼마 안 있어 얼굴을 가린 죄수가 2명의 군인에게 끌려 나왔고 죄수의 죄목을 나열하던 재판장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군중들에게 할 말이 있는가?”

 옆에 서 있던 군인이 죄수의 입을 가린 천을 벗겨주고 그를 마이크 앞에 세웠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당과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듯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군인 2명은 얼른 그의 눈과 입을 틀어막고 준비해 두었던 기둥에 그를 묶었다. 그 기둥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랐는데 그 기둥 앞에는 움푹한 구덩이가 파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3명의 사격수들이 나와 얼른 사격 자세를 취하고 사형수를 겨누었다.

 이 모든 것은 불과 1~2분 만에 진행이 되었는데 “사격 준비! 쐇!”하는 구령과 함께 총 9발의 총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사격수들의 총구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고 화약 냄새가 내가 있는 곳까지 풍겨왔다. 나는 바로 20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사형수는 목, 가슴, 허벅지, 이렇게 3곳을 밧줄에 묶었는데 총소리와 함께 묶였던 밧줄이 탁탁탁 끊어져 나갔다. 아마 밧줄을 묶은 곳을 3명이 나눠서 명중했어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사형수는 몇 초도 안 되어 구덩이에 털썩 떨어졌다. 군인들은 얼른 시체를 헌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군용차 적재함에 싣고 먼지를 일구며 휙 떠나가 버렸다.

 이 모든 것은 불과 10분도 안 되어 벌어졌으며 나는 바로 눈앞에서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다시 학교에 돌아온 우리는 뒤숭숭하여 공부를 더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공개총살은 그 후에도 몇 번 더 있었다. 배급소에 다니던 별명이 “쏜돌”이라는 아줌마도 공개총살을 당했는데 바로 배급소 쌀을 너무 많이 떼먹었다는 이유였다. 별명이 “쏜돌”이라는 의미는 그녀는 시급, 심지어 도급 간부들까지도 끼고 쌀을 빼돌렸으며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쏜 돌”처럼 어디든지 안 끼어든 데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인민재판과 공개총살을 통해 범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공개 처형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주고 체제 저항을 원천 차단하는 극적인 효과가 있다.

6. 김일성을 따라 “배움(광복)천리길”

 내가 15살이 되던 고등학교 5학년 겨울에 우리 학교에는 “배움의 천리길”을 갈 기회가 생겼는데 70명을 행군대로 모집한다고 했다. “배움의 천리길”은 북한에서 가르치는 역사에 의하면 김일성이 8살에 부모들을 따라서 만주에 가서 살다가 12살 때에 조선의 말과 글을 배우기 위해 혼자서 걸어서 중국 팔도구(8도구)에서 압록강을 건너 고향 평양까지 걸어간 노정을 “배움의 천리길”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겨울방학이면 김일성의 발자취가 스민 노정을 따라 청소년들이 행군을 하면서 그의 역사와 사상을 더욱 알고 배운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김일성이 눈보라 치는 겨울에 중국 길림성 장백현 8도구를 출발했다고 하여 겨울 방학에만 있다. 아무나 다 갈 수 없고 전국적으로 모범적인 학교에 답사권이 배정되며, 그중 우수한 학생들만 선발되어 참가한다. 또 그와 반대인 “광복의 천리길”도 있었는데 “배움의 천리길”과 반대로 되는 여정이다. 김일성이 조선에서 조선의 글과 말을 배우다가 14살 때에 아버지 김형직이 일제에게 체포되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일제를 쳐부수고 나라를 꼭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만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는 뜻에서 “광복의 천리길”이라고 불렀다. 학교 측에서는 처음으로 생긴 이 기회에 학교 선생님들의 자녀들을 우선으로 뽑았고 나머지 인원은 꼬마계획이나 공부나 여러모로 성적이 제일 좋은 학급을 통째로 보내기로 하였다.

 “배움의 천리길”은 하루에 평균 80~95리씩 걷는 행군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떠날 때는 기뻐 날뛰었지만 정작 매일 땀을 흘리며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오랜 보름 동안의 행군에 지쳐버렸다. 기찻길이 개통되지 않은 중강-전천까지는 걸어서 행군해야 했다. 강계 숙영소에 이틀을 묵게 되는데 김일성이 강계에서 이틀을 있으면서 우체국에 들러 아버지에게 전보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체국도 견학하고 김일성이 탔다고 하는 증기기관차도 구경했다. 전천-평양까지는 김일성이 기차를 탔으므로 우리도 기차로 평양까지 들어가 김일성의 생가 만경대까지 견학을 마치는 것이 일정이다. 김일성과 꼭 같은 노선을 걷는데 그가 산길을 걸었으면 우리도 산을 넘어 지름길을 걷는다. 추운 겨울에 눈이 무릎까지 오는 산속에서 특히 직고개를 넘을 때는 이름만큼이나 가파르고 험해서 많은 애들이 울기도 했다.

 그곳에서 같은 중대의 한 친구가 감기를 심하게 앓았는데 첫 시작점인 포평에서부터 앓다가 더는 걸을 수가 없게 되어 강계 도 병원에 급히 데려가니 뇌막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대오에서 떨어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2~3일만에 죽었다. 집을 떠나 추운 겨울에 죽음을 맞이한 그를 모두 안타까워 했고 그렇게 그는 죽어서도 집에 가지 못하고 객지에서 차갑게 얼어 붙은 땅에 묻혔다.

 “배움의 천리길” 대열은 군대식으로 편성되고 운영되었다. 학교는 중대 단위이고 학급은 소대 단위, 7~8명씩 분대로 이루어져 있다.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이 정해져 있고 밥시간에는 시작과  함께 끝이 정해져 있다. 매일 밤 한 숙영소에는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이 함께 만나서 숙영을 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저녁에 숙영소에 도착하면 그곳 지도원은 모두를 가까운 개울이나 강에 달려가 30분 안으로 발과 허벅지까지 냉수마찰을 하고 오게 한다. 강과 개울이 어디에 있는지 각자 알아서 찾아가야 하며 30분 안에 숙영소까지 돌아와야 한다. 저녁 시간은 온갖 장기자랑으로 문화오락 시간을 보내는 데 중대마다 경쟁률이 높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들리는 숙영소들은 밥이 참 맛있게 나온다. 집에서 먹는 것보다 휠씬 더 많은 밥과 반찬들이 다양하게 나온다. 그 귀한 명태와 가자미, 정어리, 고등어, 어쩌다 가끔은 삶은 계란도 준다. 정말 밥은 배고프지 않게 많이 먹었다. 그때가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였고 1980년대까지는 식량 사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제일 기억이 남는 것은 전천 숙영소에 머무를 때였는데 숙영소 지도원은 너무 재미난 사람이었다. 그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락시간이 돌아왔다. 당연히 무슨 노래자랑이나 할 줄 알았는데 그날은 글짓기 경연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30분 만에 작품을 완성하여 발표를 할 것이라고 한다. 주제는 바로 배움, 광복의 천리길에 대한 것으로 1, 2, 3등까지 가른다고 한다. 우리는 배낭을 벗어 던지고 발을 씻자마자 빨리 글을 지어야 했다. 내가 문학 소조에 다녔기 때문에 중대장 선생은 나를 따로 불러냈다. “솜씨를 한번 발휘해봐. 학교 명예가 달렸는데 무조건 1등은 해야지? ㅇㅇ선생님 딸이니 당연히 잘하겠지” 그는 괜히 엄포를 놓으며 부담을 줬다. 그렇지만 엄마와 나의 명예를 걸고 등수 안에는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진지하게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없으므로 나는 짧은 동요 형태의 시를 짓기로 하였다. 짧고 간결하면서 내용을 함축시킬 수 있는 동시가 제일 좋은 것 같았다. 총 3절까지 지었는데 1, 2절만 기억나고 3절은 사상적인 표현을 많이 넣어서 그런지 잊어버렸다.

동시 “우리의 마음은 하나”

떠나온 곳 가는 곳은 서로 달라도/ 얼굴도 이름도 서로 몰라도/ 우리의 마음은 하나이지요/ 김일성 원수님 발자취 따라/ 우리는 모두가 “천리길 대원들”/ 행군길에 서로가 마주칠 때면/ 손 흔들며 나누는 인사도 하나/ “잘 가라 안녕히 다시 만나자!”/ 우리 모두 함께 가는 혁명의 천리길/ 우리의 마음은 하나이지요.

 각 팀에서 3명씩 총 6명이 발표를 했는데 나 혼자 동시를 지었고 나머지 애들은 평론, 기행문, 수기, 서정시, 등등 읽는데 시간이 필요한 작품들을 지어 왔다. 내 작품이 짧지만 핵심을 잘 잡고 노랫말처럼 쉽게 풀어냄으로써 누구나 공감하고 느껴왔던 감정을 잘 반영했다며 숙영소 지도원은 1등을 주었다.

 드디어 우리는 개천 역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수도 평양에 도착하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지만 함부로 오갈 수도 없는 평양에 도착하니 느낌이 묘했다. 평양은 특별통행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나도 추방을 안 당했으면 수도 아이들처럼 세련되고 나긋나긋 부드러운 평양 말씨를 쓰며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도 있었을 텐데 참 불행한 우리집의 환경이 야속했다. 평양에 계시는 큰아버지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가는데 처음 타보는 지하철의 풍경에 황홀했고, 사거리에서 끊임없이 수신호를 보내고 있는 여자 교통안전원(경찰)이 참으로 멋져 보였다.

 북한의 지하철은 대형 모자이크 벽화, 현란한 무리등으로 장식하고 지하궁전처럼 꾸렸기 때문에 가히 세계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대형 벽화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을만큼 대중교통으로서가 아니라 예술 박물관으로서의 의미가 더 큰것 같다. 큰아버지는 어느 학교 교장으로 계셨는데 고층 건물에 사는 그의 아파트는 지방에서 사는 우리 집과는 너무 다르게 깨끗하고 먼지 하나 없었다. 숙모님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고 그래서 밥도 고양이 밥 주듯이 조금 주는데 거기 하룻밤 자는 것이 너무 배도 고프고 불편하여 다음날 얼른 숙영소로 돌아왔다. 나는 평양에 가면 그렇게 맛있다는 흘레브(쏘련빵)을 꼭 먹고 싶었는데 어디서 따로 파는 데는 없었다. 숙영소에서 각 중대마다 흘레브 열댓 개씩 배정해 주면 70 조각으로 나눠서 먹어야 했다. 두 입에 다 먹어버리면 끝이지만 정말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흘레브, 엄마가 맛있다고 늘 칭찬하던 그 흘레브는 맛이 황홀했다.

 우리는 김일성의 생가 만경대와 그토록 가서 놀고 싶었던 대성산 유원지도 견학하였는데 겨울이라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다. TV에서 꽤 멋져 보였던 놀이기구들은 여기저기 녹이 슬어 있었고 정말 작동이 되는지도 의문스러웠다. 우리는 전승기념관도 견학했는데 1953년 7월 27일에 정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전쟁이 멈추게 된 것을 북한이 승리를 했다고 기념하며 세운 기념관이다. 견학생들이 별로 많지 않은 크고 화려한 기념관 안에는 가끔 서양인들도 함께 참관했는데 처음으로 보는 서양인들이 너무 신기해 나는 옆에서 계속 훔쳐봤다. 그들의 윤기도는 하얀 피부와 옷차림은 그들의 높은 경제수준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자유분방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인을 바로 내 눈앞에서 보니 신기했다. 지방에서는 외국인을 볼 수 없

었던 것이다. 그 옆에서 함께 참관하는 바싹 야위고 마른 얼굴과 꼬질꼬질한 옷차림을 한 우리들의 모습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평양 고려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숙영소에서 보름 동안의 배움의 천리길 행군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구입 문의: https://www.bookk.co.kr/book/view/111237  

-알라딘, 교보문고, Yes 24 통해 온라인 주문

-정가 33달러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