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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3)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3. 밥짓기 도전

 내가 처음으로 밥을 짓기 시작한 것은 8살 때였다. 인민학교 2학년 여름날 저녁이었는데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다시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다가 날이 어두워 집에 와보니 남동

생 밖에 없었다. 언니들은 학교에서 시험공부 한다고 늦게까지 돌아 오지 않고 있었고 엄마는 항시 그랬듯이 10시 가까이 되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남동생은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다 지쳐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부엌에는 생쌀밖에 아무 먹을 것이 없었다. 나는 누나인 내가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는 밤 10시를 넘고 있었고 나는 할 수 없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밥을 혼자 지어보려고 결심했다.

 나는 엄마가 하던 대로 쌀을 씻어 가마솥에 넣고 불을 지피려 보니 성냥이 딱 2가치가 남아 있었다. 그 당시 성냥은 파는 데도 없고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부엌에 하도 습기가 많아 불이 켜지지 않고 찢겨서 버려지는 일이 많았다. 엄마는 아침마다 성냥이 아까워 주인집 아궁이에서 불을 붙여서 얼른 뛰어와 불을 붙여 밥을 하곤 하였다. 나는 제발 불이 켜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성냥을 그었는데 겨우 남은 2가치의 성냥은 습기에 찢어져 버렸다.

 한참 궁리를 하던 끝에 우리집에서 300m 거리 논밭에 깜박이는 등잔불을 생각해냈다. 여름이면 벼를 갉아먹는 병해충을 잡기 위해 논두렁마다 밤새껏 등잔을 켜 놓는다. 우리집에서 그곳까지 뛰어갔다 오면 3분 거리는 된다. 나는 마른 볏짚을 크게 돌돌 말아서 양손에 움켜쥐고 불을 붙이러 갔다. 불은 붙었지만 너무 빨리 타서 집에 도착하기 전에 다 타버렸다. 나는 속도를 더 내어 달리기를 반복하며 미끄럽고 좁은 논두렁 길을 달리고 또 달렸지만 계속 실패했다. 캄캄한 들판에서 얄미운 귀뚜라미와 청개구리들만 개굴개굴 나를 놀려 대며 울고 있었고 무심한 하늘은 별빛을 쏟아내며 나를 차갑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온갖 몸부림을 다 해도 불을 살릴 수 없어 갑자기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집들은 다 저녁 먹고 잠잘 준비를 하는데 왜 우리는 저녁밥 해먹을 불마저 지필 수가 없는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며 사는지 정말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마지막 2가치의 성냥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그만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집에 성냥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내가 알았으니 어떻게 포기를 하겠는가? 모두가 저녁을 굶어야 할 판이다.

 그렇게 가냘픈 몸부림은 계속되었고 끝내 나는 불을 지피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처음 해보는 밥이라 불을 때기만하고 밥솥 밑에는 탄내가 나고 위에는 설익었는데 나는 중간에 한두 번 뒤집어 줘야 한다는 걸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성냥도 없이 불을 지핀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 엄마와 언니들이 집에 오면 칭찬을 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집에 돌아온 식구들은 힘들고 배가 고픈 나머지 밥부터 서너 술 떠먹다가 탄내 나고 설익은 밥을 끝내 먹지를 못했다. 나는 칭찬은 고사하고 탄내 나서 먹지 못하겠다는 언니들의 불평을 들으며 그대로 잠들었다. 어린 마음에도 식구들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앞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4. 쫓겨난 담임선생님

 인민학교 2학년 때는 유난히 다사다난한 일이 많아서 그런지 기억나는 일이 많다. 우리 반 담임으로 진영옥이라는 19살 난 새내기 선생님이 배치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교원이 부족하여 교원대학 과정을 교원양성소에서 1년간 속성으로 수료하는 교원양성소 제도가 운영되었다. 학교는 남녀 혼합이지만 학급은 남자 반 여자 반으로 갈라서 공부했다.

 나는 학급반장이면서 학교에서 진행하는 각종 체육대회, 서클경연, 학습성적 등등 학년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국어, 수학은 물론이고 음악도 잘했다. 한번은 음악 시간에 김일성에 대한 새 노래를 배우게 되었는데 노래가 좀 어려웠다. 선생님은 풍금을 탕탕 두드리며 음정을 못 맞춘다고 애들에게 소리쳤다. 나는 한두 번 배우고 바로 따라 불렀는데 선생님은 노래를 다 배웠으니 나에게 출입문을 잡고 서 있으라고 했다. 한겨울이라 교실에 난롯불을 피우는데 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출입문을 열어 놓으면 세찬 바람에 쾅쾅 닫혀버리기 때문에 누군가는 잡고 서 있어야 했다. 그렇게 노래를 빨리 배운 덕에 나는30분가량 추운 밖에서 덜덜 떨어야 했다.

 담임선생은 나에게는 나쁘게 굴지는 않았지만 학급 애들에게 정말 못되게 굴었다. 그는 매우 폭력적이었고 말도 거칠었으며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그에게서 한 번도 맞은 적이 없는 학생은 나 말고 거의 없었다. 그녀는 시험이 끝나면 시험지를 모아서 나에게 채점을 하라고 던져 주고는 사적용무 보러 갔다가 몇 시간 후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동안 애들은 교실에서 떠들고 놀고 있고 나는 시험지마다 점수를 매겼다. 내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한 문제가 틀린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10점 만점을 주었다.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만점도 안 되는 내가 다른 아이들 시험 채점을 한다는 게 많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여선생이 교단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매주 화요일은 위생검열 하는 날이었는데 한 명씩 차례로 선생님 앞에 서서 얼굴과 교복 차림에 대해 검열을 받는다. 얼굴이나 옷차림이 단정하지 않고 지저분하면 벌칙을 받을 뿐 아니라 전교생들 앞에서 망신을 준다. 한번은 은숙이라는 애가 세수를 안하고 왔다고 꾸중을 들었다. 하지만 은숙은 세수를 했다고 대답하고 선생은 세수를 한 얼굴이 아니라며 그의 ‘거짓말’에 화를 내었다.

 우리 모두는 그 애가 혹시라도 심하게 맞게 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 까 그 선생은 함부로 자기 말에 반박을 한다며 두리번거리며 무엇을 찾다가 교실 뒤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바구니 안에서 호미를 꺼내 들었다. 학교에는 학생들 자체로 토끼를 사육하는 토끼사가 있었는데 매주 한 번씩 학급별로 돌아가며 토끼풀을 뜯어 바쳐야 했다. 그날 우리 학급이 당번이어서 우리는 토끼풀 뜯을 호미와 바구니를 갖고 왔다. 선생은 손에 든 호미 끝으로 은숙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순간 은숙이 머리에서부터 얼굴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 선생은 거의 매일 한 번씩 누군가에게 폭행을 가하곤 했는데 그날처럼 피가 흘러내리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리 평소에 선생님의 신임을 받는 나였지만 나는 갑자기 선생님한테 대들었다. “선생님. 때리지 마십시오. 피가 흐르지 않습니까?” 나는 더 이상 그의 폭행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고 다른 애들도 같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평소에 워낙 포악하고 사나운 선생이라 감히 말은 못하였지만, 교실 안에는 공포와 울분, 반항의 기운이 감돌았다. 교실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하게 변해버리고 그 친구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 그 선생은 갑자기 당황하더니 폭행을 멈추었다. 선생은 나를 불러 얼른 그 친구를 학교 진료실로 데려가라고 시켰다. 그때 학교에는 자그마한 진료실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넘어져 상처가 나거나 갑자기 아프면 바로 응급처치를 해준다.

 나는 다른 애와 함께 그 친구를 데리고 얼른 진료소에 데리고 가 정수리에 난 상처를 처치 받게 했다. 그 애의 머리카락은 피에 젖어 엉겨 붙고 상처를 찾느라고 머리카락을 잘라야만 했는데  정수리가 패이고 상처는 정말 끔찍했다. 그 당시에는 응급처치라고 해봐야 상비약도 변변치 않아 붕대와 밴드만 몇 개 있어 피를 멈추기에는 부족했다. 누군가가 얼른 가까운 집에 뛰어가 된장을 가져와서 상처에 발라주었다. 된장이 피를 멈춘 건지, 아니면 피가 오래 흘러서 멈출 때가

되었던 건지 흐르던 피는 멈췄지만 학급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폭풍 전야였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나머지 수업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그 친구의 부모들이 학교에 찾아와 항의를 하였고 교장선생님은 바로 우리 학급에 와서 진상을 알기 위해 한 명씩 불러 담화를 했다. 또 군 교육위원회에서 조사단이 내려와 평소에 그 선생님이 얼마나 자주 폭행을 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다. 하루가 멀다 하게 애들을 때리는 그 선생님에 대한 제보는 차고 넘쳤고 이때다 싶은 애들은 그녀의 폭력에 대해 모조리 털어놓았다.

 나는 폭군 선생에게서 맞은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맞은 적이 없다고 하면 그 선생을 처벌하지 않을 것 같아서 심하게 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다시는 그 선생이 교단에 서는 걸 원치 않았고 그렇게 대답해야 그 선생을 쫓아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은 그 선생은 그로부터 며칠 후에 교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교단에서 쫓겨나 농장 과수반에서 일했다.

 학교에서 학생들 간의 폭력도 일상이었다. 선생님 말고는 무서운 것이 없었던 나는 동네 남자애들을 깔보다가 그 애들에게서 호되게 뒤통수를 맞았다. 학교 공부를 끝나고 집으로 혼자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 내 이마에 바로 맞혔다. 나는 갑자기 느끼는 아픔에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주변을 둘러보니 저기 멀리서 남자애 2명이 키득거리며 달아나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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