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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창길 목사님을 기리며
leesangmook

 

 

소창길 목사님이 지난 수요일(29일) 밤 별세하셨다고 한다. 내가 보낸 카드가 화요일쯤 도착했을 텐데 아마 읽어 보시지도 못하신 거 같아 애석하다. 소 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지난 7월 어느 날이었다.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사람은 올라가고 한 사람은 내려가는 순간이어서 충분히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오자마자 대학교 동창 주소록을 찾아 전화도 해 봤고 이메일도 보내 봤으나 소용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중순 경 쓰신 카드가 도착했다. 그 동안 제가 받은 사랑과 은혜에 새삼 감사 드린다는 목사님의 카드였다. 그 말이야 말로 바로 내가 하기 위해 병원에서 오자마자 동창주소록을 뒤적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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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목사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신 건 1996년 여름의 일이다. 그 전 해인 1995년은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50년이 되는 해여서 남북이 경축행사를 크게 벌였다.


북한도 없는 살림에 해외동포 500여 명을 초청해서 행사를 치렀는데 조국의 분단을 고민하는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게 됐다. 열악한 생활수준이야 이미 잘 알려졌기 때문에 예민한 시선은 가질 필요가 없었다. 불행히도 그 해 여름 북한은 유래 없는 물난리를 겪고 있었다.


원산시 중심가에는 도로에 물이 무릎까지 올라와서 침수된 트럭들이 여기저기 방치돼 있었다. 그 트럭들은 남한에선 오래 전에 사라진 일제시대의 유물인 구형 트럭들.
그 이듬해 나는 북한방문 기행시집 ‘백두산 들쭉밭에서’를 한국에서 출판했는데 같은 시기 북한은 전 해의 홍수(북한식 용어는 큰물) 피해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몇 백만이 굶어 죽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의 대재난이었으니 자존심을 지킨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남한의 어느 목사는 옥수수를 몇 포대 등에 지고 두만강 가에서 북한동포들에게 직접 전하는 동포애를 발휘하기도 했다.


토론토에서도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주동이 돼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을 시작하고 블루어 거리에서 모금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북한 동포는 같은 민족으로서는 구제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또한 적국의 국민이기 때문에 타도의 대상이라는 게 더 굳어있던 시기여서 쌀보내기 운동도 한계가 있었다.


그때 기획했던 게 기행시집의 출판기념회였다. 수익금은 큰물 피해 구제금으로 기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장소를 구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출석 교회 강당에서 하면 되는 건데 이미 예약이 돼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때 구원투수가 돼 주신 분이 소창길 목사님이시다.
강당을 외부에 빌려 줄 때 목사님 단독으로 결정했다가는 어떤 욕을 먹을 지 모르는 게 교회다. 게다가 보수성이 강한 토론토에서 맹목적인 사람들이 종북좌파라고 딱지를 붙일 수도 있는 사람에게 빌려줬다간 두고두고 흠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소 목사님은 그 주 주말에 행사를 할 수 있도록 신속한 결정을 내려 주셨다. 덕분에 3천백불을 모금해서 북한에 송금할 수 있었다. 그 후 한국적십자사가 주관했던 북한결핵아동돕기운동도 소 목사님이 추진했으나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문에 중단된 일도 있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장 9절)’ 소 목사님이 카드에 적어 놓으신 말씀이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게 분명한데 홀연 천국으로 떠나신 소 목사님,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의 인용을 겸허히 받으며 당신이 걸어간 발자취를 다시 한 번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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