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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그 후편
leesangmook

 

탈북인총연합회가 마련한 기자회견장

 

 

‘잘 써진 작품은 없다. 잘 고쳐진 작품이 있을 뿐이다.’ 헤밍웨이가 한 말이다. 소설 ‘광장’이 그 좋은 예다. 재판이 나올 때마다 저자는 작품을 수정 보완해 왔다. 


‘광장’은 작가들의 로망. 1960년 처음 발표됐는데 지금쯤 200쇄를 훌쩍 넘었을지 모른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왜 이 소설이 제출되지 않는 것일까. 고은이 계속 실패를 하면 대안으로 왜 올리지 않는 건지 알 수 없다. 
‘광장’은 분단 비극을 그린 소설이다. 가장 한국적인 이슈이기 때문에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


주인공 이명준은 아버지가 월북했기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가서 매타작을 당한다. 견디다 못해 월북한다. 폐쇄된 그 사회에 광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찾는 광장은 공간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자유를 뜻한다. 
전쟁이 나자 명준은 북한군 장교가 돼 낙동강까지 내려간다. 거기서 만나 사랑을 나눈 간호병은 임신이 된 채 전사하고 자신은 포로가 된다. 휴전이 되자 포로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 명준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 행을 택한다. 


지난 토요일 캐나다탈북인총연합회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토론토스타의 기자와 카메라맨이 와서 취재했다. 현재 3백 명 정도의 탈북인들이 추방 통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남한 국적자이기 때문에 난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국적이냐에 따라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안위도 달라진다고 한다. 한국 국적이면 정치범 수용소의 고문이 더 가혹하단다. 캐나다 국적이면 그 강도가 좀 덜한 모양이다.


탈북인들은 남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국적만 줬지 국민 대접을 못 받았다는 것이다. 주민등록을 할 경우 북한 출신이라고 표시되기 때문에 불이익이 따른다. 군대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불법체류자보다 못한 3등 국민 신세니 돌아가기 싫다는 거다. 


‘탈북자’나 그걸 미화한 ‘새터민’은 용어 자체가 이념의 종살이다. 처음부터 ‘난민’ 혹은 6.25전쟁 때 부르던 것처럼 ‘피난민’이라고 했어야 했다. 무조건 한국으로 데려오지 말고 받아주는 나라가 있다면 스스로 국적을 선택하게 했어야 했다. 남한의 체제우위를 과시하기 위해 무조건 다다익선으로 나간 건 아닌지 반성할 대목이다.


그 때문에 남한국적을 받은 다음 캐나다로 건너온 ‘탈북인’은 ‘탈남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탈북인총연합회나 토론토스타의 기사가 그들을 영어로 ‘North Korean Defector’라고 지칭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고 본다. 내키지 않을 수 있지만 그들은 ‘South Korean Defector’의 신분이다.


그들의 처지는 남의 일 같지 않다. 소설 ‘광장’의 후편을 읽는 거 같다. 북한도 싫고 남한도 싫었던 이명준은 그나마 제3국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럴 기회마저 박탈된 ‘탈남인’들을 보면 분단의 통증이 다시 아려온다. 이민성의 인도적인 결정을 촉구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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