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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소년병(2)
leesangmook

 

 

 마태오신부님이 선종한지도 14년이 지났다. 가톨릭 교인이 아닌 나는 생전에 딱 두 번 가까이 뵌 적이 있다. 한 번은 이민 초기 30대였을 때 CNE 근처 공원. 각 교회 대항 야구시합에서다. 물론 동네 야구 수준이고 심판도 아마추어였다. 하지만 시합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친선을 위한 거였는데 이웃을 사랑한다는 설교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청을 높인 것은 신자들이 아니었다. 서로 자기 팀이 옳다고 마태오 신부님과 개신교의 목사님이 혈색을 바꿨다.


 또 한 번은 친구 집에서다. 심방 오신 신부님을 뵐 수 있었다. 그때 신부님 은 친구보고 아내를 사랑하려면 고양이를 쓰다듬는 듯해야 하고 털을 위에 서 쓸어내려야지 밑에서 쓸어내면 안 된다는 거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신부님이 어쩌면 그런 디테일도 아시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지난 주 초 토론토스타지에는 오마르 카드에 대한 기사가 다시 났다. 그 전 주 ‘돌아온 소년병’이라는 제목으로 썼던 칼럼의 주인공 얘기다. 이번에는 그의 생명을 구해낸 미군 위생병이 그 경과와 자신의 심경을 밝힌 인터뷰 기사다. 오마르 카드를 다시 소개하자면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 측에 가담해서 전투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더 유명해진 건 15세의 나이로 관타나모 수용소에 구금 돼 10년 간 고문을 받았다는 것과 캐나다 정부로부터 지난달 초 1천50만 불의 보상금을 받게 된 사실이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캐나다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그런 판결이 난 것이다.


 “꼬마 애로 보였어요. 체중 80 파운드 정도 될까. 문 앞에 와 서있는 보이로 보였어요.” 위생병의 첫 인상이다. 그런데 그 소년의 생명을 구해줬다고 그는 비난을 받는다. “총 맞은 한 마리 짐승이었지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중요한 정보를 캐내려면 그를 살려내야 했다.


 문제는 또한 그 녀석이 자기 조카와 너무 닮았다는 거다. 그래서 헬리콥터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어도 참아야 했다. 그는 2시간 이상 응급조치를 했다. 해가 지자 손가락 전지를 켜고 치료를 계속했다. 그가 살아났다는 것을 들은 것은 일 년 후의 일이다.


 캐나다 정부가 1천만 불의 보상금(물론 그 절반은 변호사비)을 결정하자 여론조사는 70%가 반대했다. 


 “1천만 불 줄 테니 오마르 카드가 당한 지옥체험을 하겠다면 그건 정신 나간 소리다.” 위생병의 말이다. 또 그림 전체를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거다. 물론 미군 사상자에게 결례를 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입장을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15살의 카드는 부모가 아프가니스탄에 데려가니까 혼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폭격 속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쓰러졌고 죽이려고 적군이 가까이 오는데 나부터도 수류탄을 던졌을 것 아닌가. 위생병의 반문이다.


 마태오신부는 한국전쟁 때 해병대 하사로 전투에 투입됐다. 포탄이 터지는 불바다에서 죽어가는 인민군을 만난다. “동무, 날 좀 일으켜주시오.” 고종옥 하사는 그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내가 보고 싶군요.” “결혼을 했나 보군?” “그렇소.” 하면서 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


 이것은 피터보로 성당에 시무했던 최종수 신부가 쓴 ‘고 마태오 평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 평전의 출판기념회가 지난 달 토론토에서 있었다.


 “모두 그를 증오할지 모르지만 그의 생명을 살려낸 것이 내겐 기쁜 일이다.” 위생병의 말이다. 그걸 읽고 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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