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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소년병
leesangmook

 

 

▲오마르 카드와 약혼녀 무나(2016년)

 

 

 탓탓탓. 소총 사격이 시작됐다. 수색하러 접근하던 미군들을 향해서다. 즉시 미군의 자동소총이 불을 뿜는다. 두 아프간 전사가 쓰려졌다. 2002년 7월 동부 아프가니스탄의 한 촌락에서 벌어진 전투다. 미군은 즉시 무전을 쳐 공중 지원을 요청. 아파치 헬기 2대가 날아와 무차별 기총소사를 한다. 이어 A10 전투기와 F18 전폭기가 번갈아 날아와 일대를 폭격했다. 쑥대밭이 된 마을로 미군이 들어가자 총탄이 날아왔다.


 곧이어 수류탄이 날아와 미군 한 명이 쓰러졌다. 전투가 끝났을 때 생존자는 한 사람이었다. 영어를 하는 캐네디언,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겨우 15살의 틴에이저였다. 그는 토론토에 태어난 캐나다 시민이다. 부모를 따라 캐나다와 파키스탄을 오고 갔다.


 아버지는 이집트 출신 캐나다 시민권자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다. 알카에다에 가담했고 빈 라덴의 주거지로 옮겨가 같이 살았다. 2001년 9.11 뉴욕 쌍둥이 빌딩 폭파 사건 이후 오마르 가족은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으로 피신. 카드는 알카에다 전사들의 통역요원이 됐다. 3개 국어를 유창하게 해서다. 


 게릴라들이 지뢰를 만드는 것도 지켜보았으니 테러리스트 수업을 한 셈이다. 사격전에서 심한 총상을 입은 카드는 유일한 생존자로서 심문에 시달려야 했다. 핵심질문은 수류탄을 던져 미군 하사 스피어를 죽였느냐이다. 카드는 현장에 혼자 있던 게 아니다. 수류탄을 던졌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어디서 던졌다는 기억이 그에겐 없다. 근처에서 사살 당한 동료가 던졌을 수도 있다. 


 수류탄이 던져진 바로 다음 그는 흙먼지 속에 묻혀 있는 사진이 발견 돼 무죄를 주장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던졌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 후 12년간의 감금과 고문을 견뎌야 했다.


 관타나모 미군 수용소에 끌려가서 10년을 시달렸고 앨버타 주 감옥으로 이송돼 2년을 고생했다. 네가 수류탄을 던져 미군을 죽인 게 맞지? 질문에 그렇다고 답해 줄 때까지 고문의 메뉴는 다양했다. 그의 몸에 오줌을 갈기고 바닥을 청소하게 하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10년 감금돼 있다가 2010년 군사법정에서 그는 유죄를 인정했다. 그래야 석방이 빨리 오기 때문이다. 그 결과 8년 형을 받았다. UN에서도 인권유린이라고 비난한 판결이다.


 군인은 전투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이 임무가 아닌가. 살인죄로 걸려들 거라 면 누가 군인이 되려고 하겠는가. 변호사 주장은 설사 미군을 죽였다 해도 무죄라는 것이다. 


 앨버타 주에서 보석으로 출소한 게 2015년. 그러고 1년 후 그의 석방운동을 했던 인권운동가인 무나와 약혼도 했다. 그녀는 앨버타 대학 출신으로 카드가 감금돼 있는 동안 SNS에 그의 이름을 자꾸 올렸다. 사회적 관심을 지속시키면 언젠가 자다가도 떡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감옥에 면회를 가는 동안 연정이 생겨 작년 약혼도 했다. 캐나다 정부는 지난 주 금요일 공식사과와 함께 1천50만불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그 중 5백만 불은 변호사 수임료. 18세 이하의 소년병은 정규 군인이 아니니까 훈계를 한 다음 석방해야 하는데 국제협약을 미국이 무시한 것은 물론 캐나다 정부 역시 자국 시민의 인권유린을 방조했기 때문이다.


 보상에 대해 캐나다 국민 70%가 반대하고, 30%가 찬성한다. 하지만 캐나다 헌법은 소년병의 인권 역시 보호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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