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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를 만나다(4)
leesangmook

 

 

(지난 호에 이어)
 한국의 대학에서 세균학을 가르치던 스코필드는 한국의 ‘병균’이 뭣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국민들의 국가의식이 투철하지 않다는 거였다. 눈앞의 개인적인 이득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거였다.


 근래 한국에선 최순실 태풍이 몰아쳤다. 국가의식이 없는 건 최순실만이 아니다. 박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좀 더 투철한 국가의식이 있었다면 어떻게 대통령의 연설문을 공직자가 아닌 최순실에게 보낼 수 있겠는가.

최순실 역시 국가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국의 대통령이 하는 연설문을 어찌 일개 개인이 오라 가라 할 수 있었겠는가.


 “이게 국가냐?” 항의 시위하는 국민들도 바로 이 국가의식의 실종을 규탄하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박근혜의 공통점이 있다면 세 대통령 다 국가의식이 온전치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 대통령들의 공적은 공적대로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의 국가의식이 좀 더 강고했더라면 종신 대통령을 하겠다고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망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법 어디에도 대통령직은 2번까지 만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워싱턴은 2번만 하고 물러났다. 심지어 왕이 돼 달라는 요청도 물리친 게 그의 국가의식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사유화의 망상은 베트남도 폐지한 교과서의 국정화 추진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스코필드가 국빈으로 초청받은 것은 광복 13주년과 정부수립 10주년을 기념하는 1958년. 이승만은 이미 부결이 선포된 후 다시 사사오입의 해괴한 논리로 번복된 개헌안에 의해 3선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었다.


 한국을 다시 찾은 스코필드의 기쁨과 감격은 몇 달 가지 않았다. 그 해 12월 24일 집권여당이던 자유당이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무리하게 통과시킨 소위 2.4정치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개정안 중 ‘허위사실을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조항’의 추가는 언론자유와 인권 탄압의 소지가 될 수 있었다. 야당인 민주당과 무소속의원 80여 명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자 자유당은 3백여 명의 무술경위들을 풀어 농성 의원들을 끌어내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실제 이 법의 적용으로 야당지였던 경향신문이 폐간되기도 했다. 스코필드는 참담했다. 3.1운동은 이 민족의 탄압이었는데 약 40년이 지나 동족이 동족을 탄압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19년을 회상케 한다-스코필드 박사가 본 2.4국회파동’이라는 글이 1959년 1월 3일자 한국일보에 실린다.

“국회의사당 주변에 경찰관들이 무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나는 1919년에 목도한 공포를 뚜렷하게 회상했다. 법이 통과되기 전만 해도 별달리 주의를 하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를 피한다. 1919년에 있던 일과 똑 같아 참으로 슬프다.”


 이런 글이 나가자 그 자신이 탄압의 대상이 됐다. 국빈으로 참석한 광복절기념식 6일 만에 그는 서울대수의과대학 교수로 임명됐고 4평의 협소한 방이었지만 서울대 외인숙소의 방도 주어졌다. 그런데 자유당정부는 강의를 중단시켰고 숙소에서도 나가라는 거였다. 


 스코필드는 하나님이 자기를 한국 땅에서 쫓아내지 않을 것을 굳게 믿었다. 그 응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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