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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고
leesangmook

      

 

 

 

 우디 앨런이 생각난다. 30년 전인지 분명치 않다. 다만 ‘100세 인생’이 공론화되기 이전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는 100세까지 살게 된다면 먹게 될 고기 값(Meat Bill)이 모두 얼마가 될까 너스레를 떨었다. 


 우디 앨런이 누군가. 코미디언이니 영화감독이니 그 앞에 천재적이라는 관형사가 붙는 사람이 아닌가. 아카데미상만도 4번을 받았다. 게다가 한국계 입양아 순이와 결혼해서 더 유명해졌다. 그때 양딸의 나이가 21세, 그의 나이는 56세, ‘세기의 불륜’이라는 파문도 일었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한국에서 일부러 사 오신 지인께 감사부터 드린다. 영국의 맨부커상을 받은 게 지난 5월이니 애먼 담론일 수도 있겠다. 


 주인공 영혜는 후천성 채식주의자다. 


 그간의 작품평에 으레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성과 폭력성의 대립이라는 뭐 그런 지적이다. 맞는 말이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소설 속에는 개를 잡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엽기 충만이다.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고 오토바이 뒤에 매달고 동네를 다섯 바퀴 돌자 개는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그 개고기국을 9살의 영혜는 밥을 말아 한 그릇 거뜬히 비운다. 선천성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인간의 순수성이 어떠니 들먹일 필요도 없다는 얘기다.


 채식주의자가 된 건 악몽 때문이다. 얼은 고기를 썰다가 영혜는 손가락을 벤다. 이가 빠진 식칼의 쇳조각이 불고기와 함께 남편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사고도 일어났다. 그 다음 날 영혜는 꿈을 꾼다. 공포영화 급이다.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영혜. 헛간 같은 건물을 들어갔을 때 수백 개의 고깃덩어리들이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다. 거기서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어먹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얼굴을 보는 순간 비위가 뒤틀리고 만다. 그건 원효대사도 비슷하지 않았던가. 각성은 자연 그 후유증이 아니던가.


그 각성은 강고해서 어떤 폭력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채식주의로 인해 본인은 비쩍 말라가고 남편을 비롯 주위에 불편이 확산되기 시작된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젓가락으로 탕수육 한 점을 집어 들어 영혜의 입에 갖다 댄다. 


 “먹어라.”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아버지의 억센 손바닥이 영혜의 뺨을 후려친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자동생보고 영혜를 붙잡게 한 후 손으로 탕수육을 입에 밀어 넣으려 한다. 이빨을 악물고 거부를 하자 다시 한 번 뺨을 후려치는 순간 입이 열리자 탕수육을 쑤셔 넣는다. 


 여기서 짚이는 것은 폭력의 본질이다. 그것은 단순히 가부장적 권위에만 국한할 성질은 아니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의 통념, 즉 한국사회가 다양성의 사회현상을 미처 수렴하지 못하는 전근대성을 소설은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나가 나의 해석이다. 


 다시 말하면 채식주의자나 동성연애자 등 소수자들을 서구의 선진국처럼 수용하는 똘레랑스(인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의견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그 똘레랑스 말이다. 영혜 역시 단호했다. 그녀는 과도를 집어 손목의 혈관을 자르고 만다.


우디 앨런에게 고기는 돈(Meat Bill)과 환산되는 열량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혜에게 고기는 생명이다.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명치에 달라붙어 있어.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 절규가 한국사회의 똘레랑스를 촉구하는 메아리가 될 수 없을까 질문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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