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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를 만나다(5)
leesangmook

 

 

 

 

(지난 호에 이어)
 연단은 일찌감치 시작됐다. 매와 눈물이 그의 어린 시절을 얼룩졌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그가 한국을 그처럼 사랑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꼭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는 것만이 매가 아니다.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어머니가 죽은 것이나 학비를 벌려고 죽어라고 노동을 했지만 돈을 벌 수 없는 것도 운명이 휘두르는 가혹한 채찍이었다.


 새어머니는 들볶기가 일쑤여서 그는 빗나가기 시작했다. 남의 지붕에 올라가서 굴뚝에 돌을 집어넣거나, 널어놓은 빨래에 흙칠을 하기도 했고, 동네 어른의 모자를 숨기기도 했다. 매를 맞는 날은 학교에 더 오래 잡아 뒀다. 집까지 시오리 길을 밤늦게 혼자 걷는다는 게 더 무서웠다. 


 집에서도 접시 닦기, 집안 청소, 구두 닦기를 제대로 해 놓지 않으면 대나무 회초리가 날아왔다. 


 스코필드는 런던에서 약 100 Km 북쪽, 럭비(Rugby)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교사를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신약과 희랍어를 가르쳤다. 예수 다음으로 존경하고 스코필드의 운명을 좌우한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이나 병자들을 동정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그에게 심어줬다.


 학비가 없어 대학을 갈 수 없었던 스코필드는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처음 1년 동안 가있었던 농장에서는 새빠지게 노동만 했을 뿐 세끼 밥 먹는 것 말고는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당시 영국은 실직자가 많았다.

품삯을 올려달라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일주 내내 일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스코필드는 부당한 착취에 분노했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게 됐다. 돈은 벌지 못한 대신 사회의 부조리에 일찍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영국에선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정부가 주선한 이민선을 타고 캐나다를 향한 것은 18세 때였다.


 토론토에 도착한 이후 인근 농장에서 반년 일하고 나니 대학에 갈 돈이 모였다. 토론토대학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은 농장에서 병든 말을 수의사가 와서 살려내는 것을 보고 결심한 것이다.


 캐나다의 겨울은 혹독했다. 난방이 거의 안 되는 지하방을 주 1달러로 세 들었는데 침대가 없어 친구 침대에서 같이 자면서 주 50센트를 지불했다. 한때는 빵과 물만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으면 인생을 알 수 없다는 교훈을 뼛속깊이 체험한 시절이었다. 


 학교 다니는 동안 버스를 타본 적이 없었다면 더 말해서 뭐 하겠는가. 난관을 극복하려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매일 저녁 죽어라고 공부했다. 하지만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아버지처럼 진실한 기독교인이 되고자 결심했기 때문이다. 2학년부터서는 110명의 학생들 중 1등을 놓치지 않고 장학금을 받았다.


 학생 중에는 흑인 2명이 있었다. 백인 학생들의 인종차별은 노골적이었다. 특히 미국 남부에서 온 학생들이 더 심했다. 하루는 학생 전체 기념사진을 찍게 됐는데 흑인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스코필드가 찾아보니 창고에 묶여 있는 거였다. 그들을 풀어주고 같이 걷자 남부 출신 학생 둘이 다가와서 협박을 했다. 스코필드는 의연했다. 협박이 통하지 않자 흑인과 같이 찍을 수 없다고 그들은 사진찍기를 거부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게 인성 아닌가. 약자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던 스코필드.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피지배자인 한국 편에 서서 지배자인 일본에 대뜸 항거를 한 거 아닌가.


 또 어려서부터 인생의 쓴 맛을 너무 보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고아들을 돌보는데 그처럼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았겠는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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