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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의 상인(商人)
leesangmook

 

 

 지난 토요일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토론토의 명물이었던 어니스트 에즈(Honest Ed's)가 문을 닫은 것이다. 약 반세기 전 이민을 와보니 제일 먼저 눈에 띈 게 어니스트 에즈였다. 한인들은 거의가 그 일대에 둥지를 틀었다. 그 일대란 ‘싸구려 백화점’ 어니스트 에즈가 있는 블루어와 배더스트 지역이다.


 집주인들은 거의 이태리나 우크라이나 출신의 이민자들이었다. 그들에게서 한인들은 2층 아니면 3층의 단칸방을 세 들어 정착의 걸음마를 뗐다. 


 당장 필요한 것은 냄비며 숟가락. 싼값에 구입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어니스트 에즈였다. 거기서 산 일제 접시는 이년 전까지 사용했다. 손때도 묻고 정까지 들었는데 마이크로오븐에 너무 자주 넣다 보니 끝내 금이 가고 말았다. 


 어니스트 에즈가 성공한 것은 바로 우리 같은 이민자들 덕이었다. 이민자들에게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싸구려로 파는 판매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주인 에드 머비시(Ed Mirvish)는 토론토의 명사가 됐다.


 베니스에 ‘베니스의 상인’이 있다면 그는 ‘토론토의 상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쁜 의미가 아니다. 하나는 악명의 샤일록이라면 인생의 후반부를 문화사업으로 빛낸 ‘전설의 상인’이 된 것이다. 


 1984년 캐나다 소매협회에서 그는 ‘최우수소매상인’ 상을 받았다. 상인으로 최고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그뿐인가. 캐나다와 영국 정부로부터 상훈도 여럿 받았다. 중학교도 못 나온 학력이지만 최고의 출세를 한 것이다.


 에드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그로서리 스토어를 하다가 파산을 하는 바람에 토론토로 이주해야 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건 에드가 15살 때. 어머니와 두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는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토론토에서도 그로서리 스토어를 하다가 안 돼 세탁소로 바꿔 보기도 했다. 이 역정은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신세를 되돌아보게 한다. 한인들의 초기 생업이 유태인들의 붕어빵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게다. 


 행운의 황금열쇠를 쥐게 된 건 그가 34세 될 때. 지금의 블루어와 배더스트 교차로 서남쪽 코너에 ‘싸구려 백화점’을 차리고 나서였다. 몇 품목은 원가 이하로 팔았다. 일부러 ’Loss Leader(손해보는 미끼)’를 던지는 전략이었다.


 점포가 미어터졌다. 돈이 가마니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돈으로 시내 킹 스트리트에 있는 극장도 사고 식당도 여럿 열었다. 너무 오래 돼 가물가물하지만 한국에서 친구가 오면 그 'Ed‘s Warehouse'라는 식당에 데리고 가 스테이크를 대접했다. 


 내부에는 별 잡동사니 장식들이 번쩍거려 기를 죽였다. 아주 비싼 데로 모셨구나, 절로 감동이 들게 했다. 하지만 에드의 상술에 따른 그 식당 역시 부담 없는 실비식당이었다.


 에드는 Princess of Wales 극장을 30년에 걸쳐 지었다.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토론토, 영국의 런던을 도는 순회공연도 조직했다. ‘라이언 킹’이나 ‘맘마 미아’는 그가 무대에 올린 대표적 히트 뮤지컬들이었다.


 다른 재벌처럼 번 돈을 부동산에나 투자하지 않고 ‘공연예술’에 투자한 것이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는 어니스트 에즈 상점 앞에서 냉동된 칠면조 고기를 무료로 나눠줬다. 매년 1천 마리 이상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30년 가까이 제공한 그의 마음씨는 고리대금에 눈이 어두워 피도 눈물도 없던 ‘베니스의 상인’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10년 전 그가 별세했고 이제 그의 브랜드 네임이었던 어니스트 에즈마저 문을 닫는다. 늘 미소를 잃지 않던 ‘토론토의 상인’ 그도 갔고 ‘토론토의 명물’ 하나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로서리 업종으로 시작한 많은 한인들 가운데 에즈처럼 문화계에서도 성공한 상인이 나오지 않은 것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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