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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식
leed2017

 

 벌써 반 년이 휘까닥 지나갔습니다. 어릴 때 안동에서 중학교를 함께 다니던 동창생으로 서울에 사는 동학 H가 전화를 했습니다. H는 2개 대학교에 총장을 지낸 녀석. 그래서 나는 재미로 그를 H총장님 하고 “님”자에 힘주어 부릅니다. 내용인즉 나의 대학교 은사 C가 올해 아흔 다섯이 되는데 오는 11월 그의 생일에 그가 설립한 ‘행동과학연구소’가 주최가 되어 그의 장수를 축하하는 큰 잔치를 계획한다는 것.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붓글씨를 한 폭 써 드리는게 어떠냐는 것입니다. 나는 C교수를 대학 은사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교수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기꺼이 헌시(獻詩) 한 수를 붓글씨로 써서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가 지은 헌시 3연(聯) 중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인생을 일러 꿈이라 하였던가

오늘 같은 날이라면 꿈인들 어떠하리

인생은 낙화유수 봄날처럼 사옵소서”

XX선생 사은 잔치에 도천 이동렬 삼가 짓고 쓰다.

 

 문제는 낙관. “XX선생 사은잔치…”에 XX선생님하고 “님”자를 넣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새는 운전기사도 “어이 김기사…” 했다가는 돌아오는 대답도 없다는데 “선생 사은 잔치에” 님자를 넣는 것이 건방지다는 후환을 방지하는 계책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님”을 남용하는 것을 비판해 왔는데 여기서는 님자를 붙이자니 왠지 느끼하고 아양이나 떠는것 같아서 그냥 “XX선생 사은잔치에”로 쓰고 말았습니다.

 요새는 서양에서 불어오는 민주주의인가 인권평등사상 때문인지 나라 안의 모든 직업이 일계급 특진을 하여 온 사회가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우선 대학 선생은 내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선생님 뿐이었는데 어느새 교수님이 되어 있고, 간호부 혹은 간호원은 간호사님으로 바뀐지 옛날. 청소부는 환경미화원님으로, 운전수는 운전사, 운전기사를 거쳐 기사님으로 승급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죄를 지어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죄수도 그냥 죄수가 아니라 죄수님이라고 “님”자를 붙여야할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진급이 안된 데가 대통령이지요. 옛날에는 대통령 각하였는데 그 사이 각하는 간다온다 말도 없이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 엄청난 권위의식 속에서도 겨울의 인동초()처럼 평등의식을 확보하려는 당찬 의지로 대통령을 한단계 끄집어 내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직업들은 모두 일계급 특진이 되었습니다. 본래 그랬어야지요. 대통령이면 됐지 각하는 또 뭡니까. 다 아참배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나이를 따지고 권위의식이 높은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내 생각으로는 가족관계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위계질서와 나이를 중요시하는  가족관계가 유교의 가르침에 힘입어 더욱 더 강화가 된 것 같습니다. 가족주의에서는 효(孝) 사상이 가정의 핵심을 이룹니다. 호란자식, 특히 아들이 부모에게 정성을 다해서 봉양한다는 말입니다. 맨 꼭대기에 앉은 아들은 동생들을 잘 보살피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가정의 효 개념을 정치에 이용했습니다. 즉 가정에서는 효(孝)이고 국가에서는 충(忠)입니다. 국가는 가정의 연장으로 보기 때문에 이승만은 국부(國父), 그의 처는 국모(國母)로 부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요. 가정에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 그대로 사회생활에 적용되어 회사에서 평직원은 집에서 아우가 형의 말을 따르듯이 평직원은 과장말을 잘 따라야 하고, 과장은 부장의 말에 복종할 것을 기대합니다. 조직사회에서는 직위=사람이 되어 계장님, 과장님, 국장님, 사장님 하며 호칭이 곧 사람을 대신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권위의식이 높은 또 하나의 이유는 감투에 대한 동경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 생각으로 한국 사람 만큼 감투를 밝히는 민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조직의 어른이 되면 인간적인 대접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어느 대학의 대학원장과 꺼벙한 술집에 갔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 아주머니가 “얘들아 원장님 오셨다”고 암행어사 출도 외치듯 큰 소리로 알리니 이 원장님은 고객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구나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감투에 대한 동경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나는 인간들이 여럿이 한데 모여 살 때 그러니까 동굴생활을 할 때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며 우두머리는 더 넓은 주거공간과 본 마누라 이외에 여러명의 처첩과 많은 특권, 그리고 많은 재물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517년 조선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드높이고 가문의 영예를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거(科擧)에 급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급제를 해야 벼슬에 나갈 수 있고 벼슬을 해야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일가족에게도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물적, 심적 풍요로움이 따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과거에 급제를 동경하는 마음이 감투를 얻으려는 열성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자면 인간의 평등의식이 만개되어야 합니다. 평등의식의 꽃이 활짝 피자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언어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대한민국 국회 법사위에서 회의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건 회의가 아니라 개들 몇마리가 으르렁대며 싸우려는 꼴이라고 할 정도로 험악한 장면이었습니다. “왜 나는 XX씨로 불러?” 자기를 “…의원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말이지요.

 호칭을 두고 한바탕 싸우는 의원도 있고 “나이도 어린 사람이…”하며 밥그릇을 무기로 공격하는 의원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나이도 어린 사람이…”로 공격받은 사람 나이가 몇살 더 위였다고 합니다.

 우리 말은 상대방에 따라 표현방식이 달라지고 매우 복잡합니다. 문장 자체가 아래와 위, 높은 이와 낮은 이, 주인과 도우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꽃이 피자면 쓸데없는 권위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네덜란드의 비교문화 학자 홉스테드(G. Hofstede)가 쓴 ‘세계의 문화와 조직’을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다른 여러나라와 비교해서 놀랍게도 권위주의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권위주의가 낮은 사회에서는 콘도미니엄의 청소부가 그 콘도미니엄 소유자와 굽실거리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사회지요. 우리에게는 퍽 가까와 보이는 곳 같이 보이지만 생각보다는 멀지요. 멀다기 보다는 까마득하지요.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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