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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이야기
leed2017

 

 조선조의 임금은 장자 승계, 즉 맏아들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지요. 조선 임금 27명 중에 맏아들이 임금 자리를 물려받은 경우는 27명 중에 단 7명 뿐입니다. 도대체 누가 맏아들로 정규승계를 했는지 적어 볼까요. 6대 단종, 10대 연산군, 12대 인종, 13대 명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7대 순종 이렇게 7명입니다.

 임금 자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거기에 앉겠다고 형제간에 다툼은 건국 직후부터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이 2번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첫 번째  난에서는 이복형제인 방번과 방석, 참모 정도전과 남은을, 두번 째 난에서는 동복형제 방간을 잡아서 귀양 보냈습니다. 형제들이 피를 흘리며 싸운 것은 단 한가지 이유 즉 임금자리에 대한 권력욕구 때문이었지요.

 조선에서 임금 자리를 놓고 형제 간에 무력투쟁을 벌인 것은 이방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무력투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그대로 있다가는 무슨일이라도 터질 것 같아 결국 형제 중 하나가 귀양을 가게 되어 사약을 받은 사람은 선조의 아들 임해군이었습니다. 성질이 난폭하고 거칠었던 형 임해군은 “임금 자리는 본래 내 것이었다”는 말을 마구 하고 다녀서 임금 자리에 올랐던 동생 광해군이 그를 유배 보내서 사약을 내렸습니다. 임해군은 임진왜란 난리 중에도 일본군과 장사를 하여 돈을 벌 정도로 기강과 윤리도덕 기준이 형편없는 개차반이었습니다.

 형제 간에 임금 자리를 두고 다퉜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형제 간에 관계가 소원해질  뻔한 왕자들이 있습니다. 세종의 형 양녕대군입니다. 양녕은 세자 시절에 태종이  물러나는 날에는 그 뒤를 이를 후보 제1호였습니다. 그러나 행실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태종의 마음에 덜 들어 세종으로 갈아치운, 어떻게 보면 비운(悲運)의 세자였습니다.

 아버지 태종이 살았을 때는 양녕은 광주에 쫓겨가 있었습니다. 태종은 사람들이 양녕대군과 내통하는 것을 일체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양녕에 대한 동정론이 살아있고 양녕대군 역시 재기의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태종의 부인 민비도 장남에 대한 기대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지요.

 그러나 세간에는 양녕이 임금이 되기 싫어서 일부러 망나니 짓을 했다느니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서 그랬느니 등등의 미담(美談)을 만들어 퍼뜨리는 것을 보면 재미있고 우습게 생각됩니다.

 27명의 임금 중에 치세를 잘한 임금은 누구일까요? 치세를 잘했다, 못했다 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서로 다를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이 보는 눈은 우리네와는 다르겠지요. 그러나 사학자들 간에도 차이는 클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생각이 가장 반듯한 사학자 천고(遷固) 이덕일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천고는 조선의 최고 임금으로 세종과 정조를 꼽습니다. 세종은 한글 창제 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한 좋은 정책을 많이 실현했습니다. 백성에 의한 치국은 거의 없던 시국에 오늘날의 여론조사 같은 것을 실시해서 민의(民意)를 살폈고, 백성을 위한 정치에서는 세종을 따를 임금은 없었지요. 그렇다고 세종이라고 실책없는 법은 없지요.

 수령 고소 금지법을 만들어 역모 이외에는 어떠한 불법행위가 있더라도 백성은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게 한 것, 이것은 세종의 명백한 실책(失策)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신분제도에 있어서 종부법을 따르지 않고 종모법(從母法)으로 환원한 것이 큰 실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종모법으로 노비의 수가 불어났으며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사회발전을 막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기득권층은 종모법을 따르면 많은 노비를 생산할 수 있어서 언제나 천인 종모법을 주장했는데 세종도 이 기득권 세력의 외침에 굴복당한 것이지요.

 22대 정조는 세종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주장에 큰 반대의견은 없을 것입니다. 정조는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한(恨)이 너무 많은 인물이 집권하면 성공적인 정치를 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품고 왕위에 올랐으나 처삼촌 홍인한, 정후겸 등 몇몇 소수 세력만 제지하고는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조를 죽이려는 노론 벽파의 끈질긴 노력은 정조가 임금이 되고 나서도 그치질 않았습니다.

 예로 정조가 임금이 되고 1년 안에 정조를 죽일 계획이 2번이나 있었습니다. 두 번 다 정조가 잠을 자던 존현각 지붕 위로 자객들이 잠든 정조를 살해할 계획을 옮기려다 실패한 것입니다. 정조가 밤 늦게까지 책을 읽는 습관이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지요. “옷도 벗지 못하고 자는 때가 몇달이 되는지 모른다”고 실토할 정도로 암살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배후 인물들을 조사해 보니 사도세자를 죽일 때 선도 역할을 한 홍계희의 아들과 손자들이었습니다. 이 암살계획을 위해서 국왕의 호위무사, 내시, 상궁, 궁녀, 청소부까지 매수했답니다. 정조는 세손시절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잡거나 놓고, 주거나 빼앗는 것이 전적으로 저무리들(노론 벽파)에 달렸으니 내가 두려워 겁을 내고 의심스럽고 불안해서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흉도들이 내 거처를 엿보다 말과 동정을 탐지하고 살피지 않는게 없었기 때문에 옷을 벗고 편안히 잠도 자지 못했다.”

 정조는 능력 위주로 인물을 뽑아 썼습니다. 다산(茶山) 정약용, 이가환, 초정(楚亭) 박제가, 청장관(靑莊館) 이덕무, 서이수 등 출세길이 막혀서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없던  서얼 출신 선비들에게 홍문관 검서관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국가정책을 토의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바야흐로 조선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불어오고 개혁의 의지가 꽃필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임금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이 이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려 놓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영조가 66세 때 새 장가를 들어 15살 나이에 시집을 와서 평생을 처녀로 지냈던 정순왕후(결혼할 신랑의 나이가 66세이니 다 갔지 않겠습니까?)는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맨 앞장을 섰고 정조가 임금으로 있을 때는 복지부동()으로 있다 정조가 죽은 다음에는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여서 조선을 다시 과거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과서에 책 이름만 나오는 것인데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썼다는 것으로 알려진 ‘한중록’이 생각날 것입니다. 내가 이 책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는 것은 그 책이 혜경궁 홍씨의 회한을 담은 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에 참고의 말씀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혜경궁 홍씨는 그의 아버지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인다 했을 때(뒤주를 구해 바친 사람이 바로 홍봉한이었습니다) 울며불며 아버지한테 달려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사가들 중에 혜경궁 홍씨도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 아버지처럼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나 노론 벽파의 당론을 따를 정도로 사태를 묵인 방조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한중록’은 남편을 잃은 설움과 한을 적은 것이 아니라 망해가는 친정을 구하기 위한 정치적 백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중록’은 4편(번)이나 썼는데 1편은 정조가 살았을 때, 2, 3편은 정조가 죽고 나서, 4편은 증손자이자 순조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썼다 합니다.

 좌우간 조선의 임금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 처럼 어느 한 세력에 팔려서도 안되고 어느 한 세력을 무시해서도 안되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만큼이나 복잡한 심리적 계산이 깔려있는 치세법칙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202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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