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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다산(茶山) 정약용을 좋아하는가
leed2017

 


▲다산 정약용 선생 초상

 

 이 세상에는 사람들의 찬사와 존경을 한몸에 받는 유명한 학자랄까 선비, 저자들이 많습니다. 과거에 세 번이나 떨어졌으나 단군 이래 가장 큰 학자로 불리는 퇴계 이황, 13살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이이, 저서 500여권을 지은 다산(茶山) 정약용이 그의 천재성을 시험, 확인하고 여러번 놀라고 이 사람이 혹시 ‘귀신’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이가환, 이익, 박지원, 박제가, 근세에 와서 일본 유학을 가려고 불과 일주일 공부하여 일본어를 마스터 했다는 이광수, 정인보, 홍명희 등은 세상 어디에 내놔도 기라성 같이 보일 천재들입니다. 나는 그 많은 천재들 중에 다산(茶山) 정약용을 가장 좋아하고 마음속으로 그를 흠모합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큰 학자들에게는 스승이 없다고 합니다. 이황, 조식, 이이, 유형원, 이익, 정제두 등 많은 학자들은 스승이 없었다고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들  큰 학자들이 스승은 없었다 하더라도 큰 영향을 준 선부들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산(茶山) 말로는 자기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선비로는 이황, 김육, 이가환이었다고 합니다.

 다산을 숭모하고 따르는 이유가 또 한가지 있습니다. 다산은 학자로서 본분을 철저히 지킨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산은 권력이 가까이 있었어도 한번도 그 권력을 휘두른 적도 없고 권력에 휩쓸려 다닌 적이 없습니다. 내 보기에는 많은 학자들, 특히 권력 주위에 어른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명예욕, 권력욕이랄까 출세욕이 남다른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남들 앞에서 말로는 자기는 권력이나 명예가 천하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권력을 끝없이 동경하며 권력 주위를 얼씬거립니다. 한마디로 이런 사람은 위선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로 집에 갇혀 있는 동안 사학자 이덕일이 펴낸 2권의 책 ‘정약용의 형제들 1, 2’를 다 읽었습니다. 사실 이 책들은 벌써 6년 전에 한 번 읽은 것으로 적혀 있는데 다 잊어버리고 이번에 또 읽으니 ‘새로 읽는 2번째’가 되는 셈이지요.

 책을 읽다가 가슴이 뭉클해 오는 한시 한 수가 눈에 띄었기에 여기 옮겨봅니다.

일어나 새벽별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하구나

묵묵히 바라보니 둘이서 말이 없고

목청 바꾸려 애쓰니 목이 메여 울음 터지네

흑산도 아득하여 바다와 하늘 맞닿은 곳이니

그래 어쩌다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가

 다산은 강진에,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나주에 있는 율정점(栗亭店)이라는 주막에서 지금 어느때고 헤어질 예정입니다. 이날의 슬픔과 통한을 동생 다산이 읊었습니다. 이 형제의 이별은 생전에 마지막 이별이 되었습니다. 정약전은 1816년에 유배지에서 죽고 동생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유배형을 마치고 18년 만에 해방되어 고향 마재로 돌아왔습니다.

 위의 시를 대하는 순간 내 가슴이 울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작별을  몇시간 앞에 두고 왜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감정이 극에 이르렀을 때는 말도 글도 필요없다지 않습니까. 마음 속으로는 백마디 천마디의 말이 오갔겠지요.

 다산은 강진에 18년을 있으면서 500여권의 책을 썼습니다(1권의 정의가 지금과는 다릅니다). 사학자 L을 따르면 인류의 명저 대부분이 감옥이나 유배지에서 썼다 합니다.  예로 손자는 두 다리를 끊긴 후 감옥에서 ‘병법’을 썼고, 한비(韓非)는 포로의 신세로 ‘세난(說難)’을, 사마천은 남근을 잘리는 치욕을 겪으며 ‘사기’를, 공자는 액을 만나 전국을 떠돌면서 ‘춘추(春秋)’를 썼다고 합니다. 볼테르는 옥중에서 ‘앙리아드’를, 세르반테스는 감옥에서 ‘라만차우 세르반테스’를, 마르코폴로는 포로의 신세로 ‘동방견문록’을 썼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이승만과 박정희는 조선 때의 위정자들 보다 더 악질이었던지 아니면 멋대가리가 없는 사람들인지, 그들은 감옥에서 책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광사, 김정희, 조희룡 같은 서예가, 화가들을 유배지에 가둬둔 것은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이나 놀랄만한 예술적 걸작들을 생산할 기회를 주는 것이니 국가적으로는 큰 경사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내 생각으로 다산은 조선 500년 역사를 통해서 가장 민생에 영향을 준 선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항상 어떻게 하면 좀 더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를 추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그러니 그는 철저히 풀뿌리 백성들의 편에 선 목민관(牧民官)이었습니다.

 예로, 그가 곡산부사로 있을 때 중앙정부가 너무 무리한 정책을 실현하려고 하자 다산은 이 정책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중앙정부에 알려서 바로잡은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행태로 보면 영락없이 시민단체나 좌빨로 몰릴만한 짓이었겠지요.

 선조들이 8대 내리 옥당(홍문관) 출신의 가문에서 태어난 다산의 어린시절은 학문으로 대를 잇는 축복받은 가정이었습니다. 다산의 5대조 정시윤이 8대 옥당의 마지막 인물이라 합니다. 당쟁 때문이었지요. 당시 남인의 영수 민암이 사형되는 통에 남인으로서 목숨을 겨우 건진 정시윤은 다시 등용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파 싸움에 넌더리가 난 그는 이를 거절하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마재(馬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산의 외가는 남인의 거두 고산(孤山) 윤선도. 고산의 증손자이자 문인화의 거두 공재(恭齋) 윤두수가 그의 외증조가 됩니다.

 마재를 찾아가면 내가 존중하는 선지의 회포를 느끼기가 어려울 정도로 관광객들로 붐빕니다. 다산이 살던 집 ‘여유당’ 뒷동산에 모셔진 그의 묘소에도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에 바쁩니다.

 다산을 따라 다니며 괴롭히던 그 세력은 지금 없어졌지요. 그러나 오늘날 중앙정치 무대에서 날뛰는 정치인들은 좌파와 우파로 갈려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꼴을 보면 옛날 다산이 살아 있을 때 그를 괴롭히던 무리의 후손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서로 수작하는 꼴이 닮아도 너무 닮았습니다. 참 서글픈 현실입니다. (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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