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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시구(詩句)
leed2017

 

 캐나다 런던 온타리오에 있는 웨스턴 온타리오대학교에 직장을 얻은 후 내 기분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우리의 옛시조를 흥얼거리는 새 버릇이 생겼다. 한창 때 나는 300수가 넘는 우리 옛시조를 거뜬히 외우고 있었으니 시조를 흥얼거린다는 것은 내게는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영어로 강의를 해야 하는 교단에서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이지 싶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감장새 작다 하고 대붕아 웃지 마라

구만리 장천에 너도 날고 나도 난다

두어라 일반 비조(飛鳥)니 네오제오 다르랴.

 

 위에 적은 숙종 때의 무신 이택의 시조를 읊으면 내가 백인교수들에 비해 못한 것이 뭣이냐는 항변성 자기주장이니 2배 30배 넘는 용기가 속에서 꿈틀거린다. 주먹 한번 휘두르지 않고 이긴 것 같은 기분-.

 나는 몇 주 전에 시조 한 수를 얻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소란을 피운 적이 있다. 얘기는 이렇다. “…오뉴월 하루해가 이다지도 길다더냐/ 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느니”. 이 시조는 노산(鷺山) 이은상의 ‘적벽놀이’라는 기행수필에 나오는 것이다. 지금부터 67년 전 6.25전쟁의 포화가 날로 뜨겁던 시국, 내가 안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국어시간에 배운 시조다. 그때 선생님은 키가 무척 크고 기골이 장대한 평양에서 온 소설가 S선생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는 이 시조의 맨 처음 시작을 잊어버렸다. 무슨 일을 당해서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군다는 생각이 들 때면 “오뉴월 하루해가 이다지도 길다더냐/ 인생은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느니”로 끝나는 이 시조 구절만 한번 외우면 먼지 날리는 황토길에 물을 뿌리는 것처럼 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곤 했다. 그러나 이 시조의 초장을 잊어버렸으니 낭패다. 아무리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으나 헛수고.

 할 수 없어 나장환 형에게 전화를 하고 “나형도 틀림없이 국어시간에 이 시조를 배웠을 테니 찾아달라”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애절한 부탁을 했다. 나형은 나와 동갑. 30년 전에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읽었던 조지훈의 시 ‘빛을 찾아가는 길’의 시작을 잊어버려 나형의 도움으로 그 시의 시작을 찾은 적이 있다. 이것이 그와 나의 교제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빠른 시일 내에 나형에게서 답이 왔다. 노산의 ‘적벽놀이’를 찾았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백년도 잠깐이요 천년도 꿈이라더니

여름날 하루해가 그리도 길더구나

인생을 유유히 살자 바쁠 것이 없느니

 

 “여름날 하루해가”를 나는 오뉴월 하루해가”로, “그리도 길더구나”를 나는 “이다지도 길더구나”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 시조를 배우고 난 뒤 흐른 세월이 67년. 그러나 이 정도로 원본 못지 않은 형태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대견한 것.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우선 보배 같은 시조를 한 수 더 얻게 되었다는 흥분에 나형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깜빡 잊고 며칠을 지냈다.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거나 가라앉히는 힘을 주는 것은 비단 노래뿐이 아니다. 그림이나 시(詩)나 소설 같은 예술작품 모두가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예술의 장르(genre)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어릴 때 익혀둔 시가(詩歌)는 어린시절을 되살려 오는데 일종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마치 홍난파의 ‘고향의 봄’을 나직이 부르면 고향마을이 눈앞에 조용히 펼쳐지듯이-.

 안동에서 중학교 다닐 때의 국어선생 S는 매우 엄격한 선생이었다. 짧은말 짓기에서 잘못하면 그 큰 선생님 손으로 내려치는 출석부 형벌이 모하메드 알리한테 머리를 한 방 맞은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나는 한번도 맞아보질 않았다. 아마 내가 무척 아첨을 잘하고 귀엽게 굴었던 모양이다.

 이제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 내 나이 어느덧 80. 잃어버린 시구는 기적적으로 나에게 되돌아왔다. 백년도 잠깐이요 천년도 꿈이라던 그 세월은 경상도 안동에서 흐르던 것이나 온타리오 평원(平原)을 휩쓸고 가는 캐나다의 찬바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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