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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복종
leed2017

 

 우리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외부로부터 오는 우리의 자유를 구속 혹은 억제하려는 힘을 느낄 때는 반사적으로 그 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 혹은 반항을 한다. 어린 정식이가 혼자서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있을 때 “정식이 여기 와서 노래 한번 해라”는 지시가 내리면 정식이는 노래를 되려 부르지 않을 확률이 크다. “노래 한번 해봐”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그 지시에 손종하기 보다는 그 반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고 저항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렇게 외부에서 오는 힘에 저항하는 것을 영어로는 reactance(저항)라고 한다.

 

 이 저항 행동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유기체에서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어릴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살다가 무덤에 가는 날까지 우리 속에 살아있는 특성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혁명이나 조선 말기에 있었던 홍경래 난, 동학농민항쟁, 4.19, 5.18 등의 민주항쟁은 시민저항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신체적 자유를 빼앗기고 감옥살이를 하는 죄수라도 마음은 자유천지를 훨훨 날아다니는 것은 쉽게 상상해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렇게 상상하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체적으로 구속을 당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구속되지 아니하고 버티며 자유천지에서 살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저항의 반대는 복종이다. 복종은 권위에서 나오는 힘에 저항 않고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한다. 권위의 지위가 높고 정당할수록 쉽게 복종이 뒤따른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그를 에워싸고 그 밑에서 충성하던 몇몇 정치인들은 대통령이라는 높은 권위에 옳고 그른 일을 구별하려 들지 않고 무조건 그의 지시에 복종의 길을 걸었다. 너무 무분별한 복종은 간신의 행동과도 통한다.

 

 나의 대학원 시절에 미국 예일대학교 실험실에서 조작된 복종을 연구한 심리학교수 밀그람(Milgram)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의 실험에 자의로 참가하였던, 어느 모로 보아도 정상적인 미국 성인들의 절반 이상이 실험자가 지시했다고 무력한 피험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강력한 벌(전기쇼크)을 기꺼이 주더라는 지나친 복종현상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피험자가 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괴로움으로 소리치는 것을 듣고도 실험자가 지시했다는 것. 그의 명령을 따랐다는 말이다.

 

 조선은 27대 517년을 지탱했던 왕조였다. 이 정도면 오래 가기로는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왕조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 왕조가 이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으로는 당시 조선사람들이 권위에 쉽사리 복종하는 버릇이 한몫 했지 싶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배웠던 삼강오륜 중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니 신유의(君臣有義)니 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권위에 복종을 암시하는 것들이 아닌가. 임금의 말이나 지시라면 무조건 복종했기 때문에 517년이나 지탱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때는 남을 치명적으로 황폐화시키는 수단으로 상대를 역모(逆謀)로 얽어매는 것이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광해군 때 6살밖에 안된 영창대군이 역모죄로 몰려 죽었다는 것을 보면 이 역모죄라는 것이 얼마나 쉽고도 가혹한 형벌인지 짐작이 된다. 세월이 흘러 민주정부가 들어서고는 빨갱이 내지 좌파가 역모가 섰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말이 민주정부이지 국민들을 공포분위기의 공안(公安)정국으로 몰아넣는데 눈이 빨개진 위정자들은 대를 물려가며 걸핏하면 무고한 시민을 좌파빨갱이로 몰아세우는데 열을 올렸다. 이승만부터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무고한 시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재산과 목숨까지 빼앗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주위를 살펴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걸핏하면 역모요, 걸핏하면 빨갱이로 몰아넣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반대의사, 즉 건강한 저항정신이 살아남기는 힘들다.

 

 저항 혹은 반대가 이처럼 무시되는 풍토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 우리에겐 건전한 토론문화가 없었다. 미국의 저명한 문화심리학자 니스벳(R. Nisbett)을 따르면 서양문화에서는 상대를 설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토론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으나, 집단원 간의 화목한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동양문화에서는 진정한 토론문화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꼼꼼히 따지는 것은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망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토론은 진정한 의견을 말할 자유를 전제하는 것. 군대에서나 관료사회에서는 복종이 하나의 미덕이요 사회생활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복종을 한다는 것은 의견의 자유선택이 들어설 자리가 줄게 마련이다.

 

 옛날 봉건사회에서 노비가 주인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민주사회에서는 권위가 누구든 그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던 미덕은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다. 영국이나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자기주장, 자기생각을 남들 앞에서 씩씩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것과 불의에 항거하는 습관을 아주 어릴 때부터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예로, 동양 문화권에서는 학문도 자기 스승의 학설을 비판 검토하고 스승의 학설에 반대되는 이론을 내놓지 못한다. 퇴계의 제자는 퇴계의 학설을 비판하거나 반대되는 학설을 내놓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퇴계의 권위에 절대 복종만이 학문적으로 살아남는 길이었다. 그러나 서양문화권에서는 스승의 학설 잘못을 뒤집고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후학들에게 인정의 박수와 학계의 찬사가 따른다.

 

 옛날에 임금이 말 한마디 하면 억조창생이 말없이 복종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요새는 대통령이 한 말씀이라도 이 말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찾아내고 반대의사를 내놓은 사람도 거리를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세상이다. 정치는 물론 예술도 학문도 배우고 가르치기가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진작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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