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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간 세월
leed2017

 

 나는 지금 캐나다 밴쿠버에서 미국 알래스카로 가는 유람선 위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평생 처음 타보는 유람선, 말로만 듣던 유람선에 이 경상도 촌뜨기가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맡기고 있습니다. 바라지도 않았던 작은아들 내외의 초청으로 이런 호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알래스카에 간다고 하니 52년 전 일이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여름방학 때 학교에서 나오는 장학금 외에 돈을 더 벌어보려고 알래스카에서 고기잡이배를 타면(사실은 불법이지요) 수입이 좋다고 해서 거기도 원서를 냈는데 합격하질 못했던 일-.

 

 유람선에는 세계의 온갖 나라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아침에 같은 테이블에 앉아 아침을 먹던, 나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부인은 유람선 여행이 이번이 마흔 일곱번째 라면서 오는 10월에는 또 어디로 유람선 여행이 예약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유람선 손님 간에는 별 깊은 얘기는 없고 그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먼저번 여행은 어디로 갔었느냐 같은 겉도는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헤어집니다. 유람선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명랑과 친절이 몸에 밴 것 같았습니다.

 

 팁은 여행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로 줄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친절하게 봉사해주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냥 가만히 받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집사람은 남몰래 종업원 손에 팁을 쥐어주곤 했습니다. 나는 못 본 척 했지요.

 

 나는 이들이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이렇게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 와서 배를 타고 다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들을 보는 눈길이 자꾸만 애처로워 집니다. ‘이 사람들도 언젠가 여유가 있으면 가족들을 데리고 이같은 유람선에서, 이번에는 종업원이 아니라 어엿한 승객으로 여행할 날이 오겠지’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캐빈(cabin)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망망대해를 눈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세상일은 모두가 저쪽에서 벌어지는 것, 나는 그것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어릴 때 있었던 일, 20, 30,…60, 70년 전, 까마득한 옛날에 있었던 일들이 자꾸 튀어나옵니다. 내용은 별것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지요. 한 가지만 얘기를 하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피아노 학년으로 7학년을 하고는 피아노를 그만 배우겠다 하여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한 번도 키와니스(Kiwanis) 같은 음악경연에는 나가보질 않았습니다. 내가 아이들의 애비로써 허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어디서 배운 개똥철학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키와니스 경연에 나가서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신이 나서 또 연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음악에 대한 내적흥미를 발동시켜 피아노를 연습해야 된다고 잘못 생각했었지요. 이것이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은 내가 색소폰을 배워보고 나서야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같은 어른도 사람들 앞에서 박수도 받고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으쓱, 더 연습을 열심히 하게 되지요. 이러다보면 음악 자체에 대한 내적흥미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어요. 초등학교 3학년이 될까 말까한 어린아이에게 음악에 대한 내적흥미를 발동시켜 연습을 해야 한다는 무식한 부모노릇을 했으니 기가 찰 노릇이지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잘못도 만경창파에 떠가는 일엽편주에서는 얼마든지 내 잘못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육지에서는 안되고 유람선에서는 되는지 나도 모릅니다. 언젠가 아침 테이블에서 이 얘기를 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아들놈이 빙긋이 웃으면서 “그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라는 짧은 대답을 하더군요. 더 밝고 명랑한 얘기나 하라는 말 뒤의 말인 것 같습니다.

 

 군중 속에서 외로움을 느껴보기가 가장 쉬운 곳이 유람선 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 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더군요. 그러나 딱 거기까지. 부부 사이가 모두 행복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가 모두 좋은 효부효자들만 유람선을 탄 것은 아니겠지요.

 

 배에 오른 사람들 중에는 멀어진 부부관계를 좀 더 다정하게 만들어 보려고, 멀어진 자식-부모 관계를 좀 더 가깝게 만들어 보려고, 직장에서 일을 잘해서 받은 상여금으로, 그외 별별 이유가 다 있을 것입니다.

 

 유람선은 우리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 잔잔한 밤물결을 헤치며 조용히 소리없이 미끄러져 갑니다. 내 생각도 옛날, 그 옛날로 거기에는 아무 원망도, 회한도, 질투도, 눈물도 없는 순정의 그 세상으로 자꾸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혹시 세월이 거꾸로 가는 것은 아닐까요?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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