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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이 상제 살찌게 먹여
leed2017

 

녹이 상제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

용천 설악을 들게 갈아 둘러 메고

장부의 위국충절을 세워볼까 하노라

 

 녹이나 상제 같은 좋은 말(馬)을 살찌게 배부르게 먹여 시냇물에 잘 씻어서 타고 눈같이 번쩍이는 용천검을 잘 들게 갈아서 어깨에 둘러메고 사내대장부가 나라 위해 바치는 일을 해볼까 하노라.

 

 누가 읽어도 작자는 칼 쓰고 활 쏘는 무인이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는 시조다. 지은이는 고려 말기의 명장 최영이다. 위의 시조에서 용천설악이란 초나라 임금이 오와 월 두 나라의 이름난 칼을 만드는 장인(匠人)에게 칼 세자루를 만들게 했는데 그 첫째가 용천이다. 설악이란 눈처럼 번쩍이는 칼날을 의미한다.

 

 최영은 고려말의 이름난 보수파 장군으로 이성계에게 목숨을 잃었다. 고려말에는 중국의 홍건적들이 2번이나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도 도적떼의 수중에 들어간 적이 있고 왕은 저멀리 경상도 안동까지 난을 피해 도망간 적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왜구들도 대규모로 침입해서 나라 전체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이때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한 인물은 이자춘, 이성계 부자였다. 이자춘이 갑자기 죽자 당시 26살이던 그 아들 이성계가 이름을 얻게 된다. 이때 명나라에서는 철령 이북의 땅을 돌려달라고 함으로 공민왕은 이 기회에 명을 칠 생각을 하고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이성계, 조민수를 선봉장으로 삼아서 출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성계는 명과 싸울 수는 없다는 4가기 이유를 들어 출정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이성계는 압록강 어구에 있는 섬 위화도까지 가서 군사를 돌려 수도로 되돌아 왔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 한다.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을 잡아 죽였다. 이렇게 하여 최영은 자기보다 19살이 더 어린 이성계의 손에 죽어서 고려의 만고충신이란 명예를 얻은 것이었다.

 

장검을 빼어들고 백두간에 올라보니

대명천지에 성진이 잠겼세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볼까 하노라

 

 긴 칼을 뽑아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밝고 밝은 세상에 피비릿내 나는 먼지가 자욱하구나.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오랑캐들과의 전쟁은 언제쯤 말끔히 헤쳐볼까? 무인으로서 남이의 씩씩한 기상이 엿보이는 장한 노래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28세 청춘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남이의 한시 한 수를 소개한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의 돌들은 칼을 갈아 다 닳았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남질 않았다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사내 나이 이십에 세상을 평정치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겠는가

 

 위의 시에서 未平國(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未得國(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예종께 보고하여 남이가 역모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충동질을 한 것이다.

 

 박명수의 ‘조선유사’에서 빌려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이는 16살에 장원급제하여 이시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세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남이는 태종 이방원의 외손자인데다가 당시 권세가요 개국공신이기도 했던 권람의 사위이기도 했으니 세조가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시애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서는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그때 남이의 나이 불과 28세.

 

 승승장구하던 남이도 아내인 권람의 딸과 이혼을 하게 되고 남이를 아끼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임금이 되고는 사정이 급변하였다. 예종이 왕위에 오르고 그의 출세를 시기해 오던 유자광은 남이에게 큰 죄를 무고로 덮어 씌웠다. 당시 18살로 남이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끼던 임금 예종은 유자광의 고자질에 넘어가서 즉각 국문을 시작하였다.

 

 남이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상황은 남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남이의 친척들은 혹시 자기가 거기 연루될까 싶어서 남이와는 접촉을 피하고 지내왔다고 둘러댔다. 어차피 죽게될 줄 안 남이는 갑자기 “신은 강순이 가르쳐 주는대로 했을 뿐입니다” 하며 난데없이 영의정 강순을 끌고 들어왔다. 강순은 순간에 죄인으로 몰려 고문을 당했고 고문에 못이겨 모반에 참여했다고 자복했다.

 

 남이는 강순의 꼴을 보고서 말했다. “내가 처음 불복한 것은 후일을 생각해서였소. 그러나 이제 다리뼈가 다 부러지고 폐인이 되었는데 살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나같은 젊은이가 이러하거늘 다 죽게된 늙은이가 죽은들 어떻소. 억울하게 죽기는 그대나 나나 마찬가지. 그대는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부하의 억울함을 보고도 한마디 변호가 없었으니 죽어 마땅하오!”

 

 남이가 죽은 후 무속인들은 그를 사당에 모셔 위로하면서 무병장수와 행운을 기원했다. 무속인들이 그들의 사당에 모시고 비는 신 중에는 유난히 장군들이 많다. 강감찬 장군, 최영 장군, 남이 장군이 대표적이다. 박정희, 전두환 같이 악명으로 역사에 남은 독재자들도 나올지는 모르지마는 내 생각에는 이들은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지 자신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무병장수와 행운을 가져다 주는 신이 되기에는 자격미달이지 싶다.

 

 장군이라 할지라도 억울하게 죽은 명장이어야 신으로 모셔지는 모양이다. 중국에서는 비간(比干)과 관우 장군이, 우리나라에서는 남이와 최영 장군이 대표적이다. 비간은 폭군 주신을 꾸짓다가 처형당했고, 최영은 이성계 일파에게, 관우는 조조에게 참형을 당했는데 죽어서도 조조를 노려보며 눈알을 굴렸다고 전한다. 이렇게 죽은 장군들은 저승에서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고 마침내 신이 되어 어렵게 사는 백성들의 한을 풀어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철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삭풍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만리변성은 국경 근처의 성, 긴 파람은 길게 부는 휘파람, 일장검은 한자루의 긴 칼이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섭고 추운 바람은 나무가지에 윙윙거리고 겨울의 밝은 달은 눈에 파묻혀 찬기운만 느껴지는데 국경지대에 있는 외딴섬에서 긴 칼을 짚고 서서 북쪽을 노려보며 긴 휘파람을 불고 크게 한번 고함을 질러보는 호기에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구나.

 

 조선 전기의 문신 절재(節齋) 김종서의 작품이다. 절재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함길도 도관찰사가 되어 야인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문종이 죽고 단종을 보필하였으나 수양대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되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수양대군이 무사 양정, 임어을운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수양은 김종서에게 청이 있다면서 편지를 건넸다. 김종서가 달빛에 편지를 비춰보는 순간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려쳤다. 아들 김승규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몸으로 덮자 양정이 칼로 찔렀다. 두만강 육진 개척의 원훈 김종서가 이렇게 쓰러지면서 조선의 물줄기를 송두리채 바꾸는 계유정난이 시작되었다. (202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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