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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아 말 물어보자
leed2017

 

청산아 말 물어보자 고금 일을 네 알리라

만고 영웅이 몇몇이나 지냈느냐

이후에 묻는 이 있거든 나도 함께 일러라

 

 푸른 산아 말 좀 물어보자. 옛날부터 오늘까지의 일을 너는 잘 알고 있겠지. 오랜 세월동안 이름을 떨친 영웅들을 몇사람 겪었느냐. 이후에 너에게 또 묻는 사람이 있거든 내 이름도 말해 넣어주려무나.

 

 이 시조 저자의 이름은 김상옥. 영조 3년에 태어나 정조 14년에 죽었다. 본관은 해풍. 무과에 등과하여 계미 통신사에 참여하고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나 1778년에는 우포도대장을 역임했다. ‘청구영언’에 시조가 실려 있는 김영의 아버지다.

 

 위의 시조에서 저자의 기개를 알 수 있다. 영웅이 여기 있으니 만고의 영웅을 꼽을 때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이다. 태산을 밀어부칠만한 기개와 배포가 숨어있는 시조. 이런 당차고 호기있는 시조를 쓴 사람은 김상옥 말고도 몇 사람이 더 있는 것으로 안다.

 

대붕을 손으로 잡아 번개불에 구워먹고

곤륜산 옆에 끼고 북해를 건너 뛰니

태산이 발길에 차여 왜각데각 하더라

 

 하루에 구만리를 난다는 대붕이라는 큰 새를 잡아서 번개불에 구워먹고 곤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훌쩍 건너 뛰니 태산이 발길에 차여 왜각데각 소리가 요란하더라.

 

 내 소견으로는 위의 시조 ‘대붕을 손으로 잡아…’는 문학성도 부족하고 말도 안되는 기개이나 그 배포 만큼은 비정상적으로 크다할 수 있겠다. 바로 앞으로 김상옥의 시조 ‘청산아 말 물어보자’는 사나이의 씩씩하고 호방한 기상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위의 ‘대붕을 손으로 잡아’는 술 취한 사람의 허황된 취중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현실에 가까운 용기랄까 기개는 다음 남이 장군의 시조 두 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적토마 살찌게 먹여 두만강에 씻겨 타고

용천검 드는 칼을 선뜻 빼어 둘러메고

장부의 입신양명을 시험할까 하노라

 

 중국 위, 오, 촉 삼국시대 때 관운장이 탔다고 전하는 명마 적토마를 잘 먹여 두만강 물에 씻겨 타고, 천하 보배로운 칼로 불리는 용천검을 선뜻 뽑아 둘러메고 장부로서의 큰 공을 세워 세상에 이름을 떨쳐 볼까 하노라.

 

오추마 우는 곳에 칠석 장검 비겼는데

백이 산하는 뉘 땅이 되단말고

어즈버 팔천 제자를 어느 낯으로 보련고

 

 항우가 탔다고 전해오는 명마 오추마를 타고 사람 키 높이만한 장검을 비껴 들었는데 진나라 백이의 산하는 오늘날 누구의 땅이 되었는가(한의 차지가 되고 말았지 않았는가). 아, 전쟁에 패하고 강동에서 데리고 온 팔천의 건아들이 대부분 죽고 말았으니 항우 너는 무슨 낯으로 그들의 부모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항우와 유방의 싸움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초나라의 명장 항량의 아들 항우는 진시황이 죽은 해에 22살, 그와 천하를 두고 다투던 유방은 37살이었다(일설에는 46세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 두 사람이 군사를 일으킬 때 유방은 패현에서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자제 3천명을, 항우는 정병 8천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항우는 용감하기는 했으나 성질이 급하고 불 같았으며 유방은 주위에 장량, 나중에 들어온 한신 같은 능력있는 참모들이 많았는데 그는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타입이었다고 한다.

 

 유방의 군대에 포위당한 항우는 사랑하던 우미인의 자결을 본 후 오강까지 가서 자기를 믿고 따라온 8천 군사가 대부분 죽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위의 시조 2수를 지은 남이는 어떤 사람인가? 남이는 조선 전기 세조 때 이름을 날리던 무신이다. 태종 이방원의 외손자, 즉 남이의 어머니가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로 축복받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무과에 급제, 7대 임금 세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왕좌에서 몰아낸데 불만을 품은 이시애의 난이 터지자 이 난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거침없이 잘나가던 남이의 행로에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렇다. 하루는 대궐에서 숙직을 하고 있을 때 혜성이 나타났다. 이를 본 남이는 “묵은 것은 까뭉개고 새것이 나오려는 징조”라고 했다. 옆에서 이 말을 들은 유자광(이시애 난에 남이와 함께 공을 세운 세조의 사랑받던 무인)은 남이가 역모를 꿈꾼다고 예종에 고자질했다. “묵은 것을 까뭉개고 새것이  나온다는 징조”라는 말은 보통말로 들릴 수 있으나 이 말이 역모를 꿈꾼다는 말이 더하면 그럴듯하게 들리는 고자질이 된다.

 

 요새 세상에는 저 사람이 ‘빨갱이’ 혹은 ‘좌파’라고 하면 무고한 사람을 얽어매는데 더없이 좋은 수단인 것처럼 그 시대에는 역모했다는 한마디면 이 세상에 그 이상 좋은 고자질은 없었다. 임금이 되기 전 세자 시절부터 남이를 좋지 않게 생각하던 예종은 이 기회다 싶어 남이와 가까운 영의정 강순까지 죽여 버렸다. 그때 남이의 나이 피끓는 28살이었다.

 

 20대에 병조판서가 되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던 남이는 일개 무장 유자광의 모함에 걸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남이를 모함한 유자광은 이후에도 무오사화를 비롯하여 여러번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고자질을 해서 악명을 날렸다. 남이가 그의 첫 먹이감이라고 볼 수 있다. (202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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