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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까 올까 하여
leed2017

 

올까 올까 하여 기다려도 아니온다

닭이 울었거니 밤이 얼마 남았으리

마음아 놀라지마라 임 둔 임에 오더냐

 

 꼭 오리라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임이 아니오네. 닭이 울고 새벽이 올 때까지 아니오니 아차 내 임에게 다른 임(애인)이 생겼나보다. 마음아 놀래지 마라. 임에게 새 임이 생겼으면 나한테 올리가 있겠느냐. 스스로 마음속으로 의심을 해보는 가녀린 여성의 마음씨를 엿볼 수 있다. 가랑비가 되어 잠들어 있는 임의 방 창문을 들어치겠다느니 두견새가 되어 밤새도록 울어대서 임이 잠을 자지 못하게 한다든지와 같은 짓궂은 행동은 피하겠다는 말이다. 나같은 남자편에서 생각하면 이런 행동은 훨씬 격이 높고 합리적인 생각이다. 무명씨의 노래다.

 

달 같이 뚜렷한 임을 번개같이 언뜻 보고

비 같이 오락가락 구름 같이 헤어지니

가슴에 바람 같은 한숨이 안개 피듯 하여라

 

 그리던 임을 잠시잠깐 보고는 구름처럼 헤어져 버리니 바람같은 한숨이 안개 피듯 피어나네.

 

 지은이는 무명씨. 일기예보를 하던 어느 관리의 따님인가. 번개, 비, 구름, 안개 등을 끌어대며 임과 같이 만남, 헤어짐, 그리고 그이에 대한 그리움을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압록강 해 진 뒤에 어여쁜 우리 님이

연운(燕雲) 만리를 어디라고 가시는고

봄풀이 푸르고 푸르거든 즉시 돌아오소서

 

 압록강에 해는 졌는데 어여쁜 우리 님이(소현, 봉림, 인평대군) 머나먼 연경(북경의 옛 이름) 길을 어딘줄 알고 가시는가. 내년에 봄이 와서 봄풀이 파랗게 돋아나면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 오소서.

 

 위의 노래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의 세 왕자(소현세자, 봉림, 인평대군)들이 청에 볼모로 끌려가는 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과 그들의 안전을 비는 노래다. 지은이는 당시 왕자들을 수행했던 통역관 장현이다. 장현은 역관 집안 자제로 1639년 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역관으로 활동하였다.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6년간 청에 머무르다 돌아왔다. 그가 남긴 시조 작품도 역관 신분으로 느낀 감회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많다.

 

 병자호란에 대해서 몇마디 적어보자. 인조가 왕이 되고는 광해군이 따랐던 외교정책을 버리고 친명배금(명나라와 친하고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따랐다. 후금의 요구사항이 심해지자 조선은 먼저 후금을 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바꾸고 청태종은 군사 12만명을 이끌고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백마산성을 피해 서울로 곧바로 진군하였다. 적군이 그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별다른 싸움없이 40여일이 지났다.

 

 그 사이 식량은 떨어져가고 군사들은 전의를 잃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1637년 1월30일, 인조는 한강 동편 삼전나루에 죄수복인 푸른 색깔의 옷을 입고 나와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난리가 끝나고 소현, 봉림, 인평 세 왕자들은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다. 앞에 ‘압록강 해진 뒤에…’의 시조는 연경으로 끌려가는 3세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인평은 그 이듬해 돌아왔다).

 

 청은 조선땅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여자들만 보면 겁간하고 약탈하였다. 불과 45년 전 임진왜란 때는 경상남북도에서 일본군대에 겁간당한 여자가 250만 정도 된다는 보고를 읽은 적이 있다. 임진, 병자호란 합해서 300만 정도의 조선 여인들이 겁간을 당했다고 보자. 그 중 1천명이 본의 아닌 임신을 했다고 치면 4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날 왜와 청의 DNA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수백만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단일민족’이라는 말의 순도도 많이 줄어든다는 생각도 든다.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제

사공은 어디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위의 시조를 지은 중봉(重峰) 조헌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23살 나이로 과거에 급제 정주 목, 파주 목, 홍주 목의 교수를 역임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 옥천으로 내려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으나 금산성 싸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의병 700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저서로는 ‘중봉집’이 있다.

 

호화코 부귀(富貴)키야 신릉군(信陵君) 할까마는

백년이 못되어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나같은 장부야 일러 무삼 하리오

 

 온갖 사치와 부를 누리기야 저 중국 전국시대에 식객(아무 하는 일도 없이 남의 집에 얹혀서 밥만 얻어먹고 지내는 사람)을 3천명이나 거느렸다는 신릉군과 같을까마는 그가 죽은지 100년이 못되어 그의 무덤 위에 밭을 가니 나같은 보통사람이야 말해서 무엇하리.

 

 위의 시조는 조선 중기의 문인 고봉(高峯) 기대승의 작품이다. 이백의 시에 “옛 사람들은 신릉군의 부귀영화를 부러워 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그의 무덤 위에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昔人豪貴信陵君 /今人耕種信陵墳)”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인생무상,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교훈으로 볼 수 있다. 고봉은 광주 선비이며 기묘사화 때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던 선비이다. 성질이 무척 강직하고 직언을 좋아해서 기존 세력들과 자주 충돌하였다.

 

 학문에 뜻이 컸던 그는 안동 예안의 퇴계 이황과 학문적인 인연을 맺어 12년(그러나 보통 8년이라 함) 동안 서신을 통한 논쟁을 해서 성리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퇴계보다 26살 아래인 고봉은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여 인간의 정신활동에서 지성을 중시하는 주지설(主知說)을 반대하고 감정이나 정서를 중시하는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였다. 나이로는 고봉의 아버지 뻘 되는 퇴계는 겸허한 자세로 이 천재 선비의 날카로운 이론을 경청하고 신중하게 답하였다.

 

 두 선비 간의 논쟁은 김영두의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에 나와 있다. 전화도 전자우편은 물론 Fax도 복사기도 없던 500년 전에 광주에 있던 선비와 안동에 있는 선비 두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1년 나는 ‘퇴계 서예 전시회’에서 퇴계가 죽기 며칠 전 그가 직접 쓴 유언장을 본 적이 있다. 그 유언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작은 돌에다 벼슬과 이력은 다 없애고 다만 ‘퇴도 만은 진성 이공지묘’라고만 쓰고… 기대승 같은 사람에게 내 행장(行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평생에 지낸 행적을 적은 글)을 부탁하지 마라. 기대승 같은 사람은 신상에 없던 일로 장황하게 써서 세상의 웃음거리를 만들 것이니…”

 

 이 유언을 보면 두 선비가 얼마나 서로 존경하고 허물없는 사이였는지를 알 수 있다. 퇴계는 고봉이 자기를 극구 칭찬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의 이와같은 유언에도 불구하고 퇴계 무덤 옆 묘갈명(무덤 앞에 세우는 돌비석에 새긴 글)을 지은 사람은 다름아닌 고봉 기대승이었다.

 

 두 석학의 학문적인 인연과 애착은 나이나 학설, 지역의 차이를 초월하였던 것이다. 고봉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 고부에서 죽으니 향년 45세였다. 그는 죽은 후 광주의 월봉서원에 제향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20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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