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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의 한탄
leed2017

 

나는 본디 약 캐던/ 산중 늙은이/ 어찌다 강에 와서/ 사공 되었네/ 서풍 불어 서쪽 뱃길/ 끊어 놓기에/ 동으로 되가려다/ 동풍 만났네/ 바람이야 일부러/ 나를 어기랴/ 내 스스로 바람을 아니 따른 탓/  아아 바람이 그르니 내가 옳으니/ 따져 뭘하나/ 돌아가 산 속에서/ 약초나 캐려네/
 

 위의 시(詩)는 본래 ‘사공의 한탄’(雇工歌)이라는 제목의 한시(漢詩)이다. 지은이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상가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대학자인 동시에 사실주의의 대문학자 다산(茶山) 정약용이다. 그가 수백권에 이르는 책을 썼음에도 한글로 된 시조가 한 편도 눈에 띄질 않아 예외를 만들어 다산의 소작으로 손종섭의 ‘옛 시정을 더듬어’에서 ‘사공의 탄식’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는 것을 여기 옮겨 적었다.


 “나는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즐겨 조선시를 짓노라(我是 朝鮮人甘作朝鮮詩)라고 선언한 다산은 애석하게도 한글 시조는 없다. 그러나 그는 시를 써도 불쌍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한 소위 시민운동가의 시 같은 시를 많이 썼다. 다산은 철학, 의학, 공학, 경제 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학문에 통달해서 평생 수 백 권의 책을 쓴 대학자이다.


 영조때 실학의 4거두의 한 사람인 강산(薑山) 이서구가 영평에서 대권로 오다가 지게에 책을 가득지고 북한사(어떤 책에서는 수종사로 된데도 있음)로 가고 있는 한 소년을 만났다. 열흘이 지난 후 고향 영평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강산은 책을 지고 오는 그 소년과 또다시 만났다.


 호기심이 발동한 강산이 물었다. “너는 누구이기에 글은 읽지 않고 책을 지고 싸돌아 다니기만 하느냐?” “책을 읽고 절에서 내려오는 길입니다.” “무슨 책을 읽었느냐?” “강목(綱目)입니다.” 강목은 ‘자치통감 강목’을 일컫는 것으로 중국 역사를 다른 아주 방대한 책이다. 송나라 때 사마광이 쓴 역사서인데 주희가 편집하고 해석한 책이다.   


 “강목을 어찌 열흘만에 다 읽었다는 말이냐?” “읽은 게 아니라 외웠습니다” 소년의 말에 놀란 강산이 지게에서 몇 권 뽑아서 시험해보니 소년은 돌아서서 거침없이 외우는 게 아닌가.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 소년이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이었다.


 다산의 일생을 좀 더 자세히 적어보자. 정약용은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해에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를 지내다가 대다수의 남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쟁으로 물러나 고향에 있었다. 정조가 임금이 되자 정재원이 호조좌랑에 임명되는 바람에 한양에 올라온 다산은 그의 외가를 자주 찾았다. 그의 외증조부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으로 명망있는 문필가이자 화가요 장서가였으나 남인이었던 관계로 출세길이 막혀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산은 외가에 있는 책을 읽기 위해 자주 드나들었다 한다. 누나의 남편인 이승훈과 이승훈의 소개로 이익의 종손 이가환을 알게 되어 실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스무살 때 과거에 응시했지만 떨어졌고, 다음해에 재수하여 합격, 생원이 되었다. 다산은 1789년 정조 앞에서 치른 전시에 장원으로 합격, 초계문신의 칭호를 얻었으며, 그는 이때 배다리를 준공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수원성 수축에 동원되어 기중기를 제작해 공사기간을 단축하였다. 정조의 특명을 받아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 지방의 서용보 일당의 범죄사실을 보고하여 서용보를 해직시켰다. 하지만 해직당한 서용보는 앙심을 품고 평생 다산을 따라 다니며 그를 죽이는 모략을 꾸미게 된다. 나중에 조정을 장악한 노론 벽파들은 신유사옥을 일으켜 정약종, 이가환, 이승훈 등이 투옥되어 죽는다.


 간신 서용보의 간언으로 정약용은 유배에 처해진다. 그래서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동생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된다. 지방 선비 윤박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정자 하나를 얻게 되는데 거기에 1천 여권의 장서가 있었다. 이 초당에 있으면서 그는 자신의 호를 ‘다산’이라 부르고, 그가 머물던 곳을 ‘다산 초당’이라 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비롯하여 수십 권의 책을 썼다.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학문에 전념하여 ‘여유당집’ 250권, ‘다산 총서’ 246권 등 모두 508권에 달하는 책을 썼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다.


 다산이 해배(유배에서 풀려남)된 일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즉 다산의 친구 김이재가 신유사옥으로 유배를 왔다가 해배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산초당을  찾아왔다. 그 때 다산은 그의 부채에 ‘송별’이라는 한문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김이재가 서울에 도착, 당시 노론이요 안동 김씨 가문의 큰 어른이요 권력의 핵심 김조순을 예방하였다가 우연히 부채에 적힌 다산의 시(詩)가 김조순의 눈에 띄었다. 그 시를 읽은 김조순이 감명을 받아 임금(순조)에게 주청을 하여 다산은 해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엄청난 저작을 남긴 다산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목민심서’를 빌려와서 읽어본 적이 있다. 재미가 없어서 5장을 못넘기고 집어던져버린 생각이 난다. ‘목민심서’란 주로 관리들이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지녀야 할 태도나 자세, 방법 등에 관한 책인데 면서기도 못해본 고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무슨 의미가 와 닿겠는가.


 다산은 의술에도 밝아 임금이 죽을 당시에 다산을 불러오라는 하명이 있어 다산은 대궐로 불려간 적이 있다. 그런데 다산이 보니 임금의 병은 살아날 가망은 전혀 없는 운명직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산은 약이 그의 집(마제)에 있으니 가서 가져와야 한다며 급히 약을 가지러 간 사이에 임금은 죽고 말았다. 임금의 주치의는 임금이 죽고 나면 관례상 치료해준 주치의를 유배 보내는 것이 조선의 괴상한 풍토였다.


 정조는 다산 뿐 아니라 능력은 탁월하나 출신성분 때문에 가로막혀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의 석학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다산을 위시한 실학사상으로 온 나라가 개혁의 꿈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지병인 종기로 고생하던 정조가 갑자기 죽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모든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조선은 옛날의 노론 벽파 시절로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2020. 5)


다산 정약용 선생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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