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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은 나를 보고
leed2017

*본보는 금주부터 이동렬 교수의시조산책 연재합니다. 한국의 주옥같은 고전 시조들을 필자의 해박한 지식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는 연재물에 독자 여러분의 애독과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편집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위의 시는 한문으로 쓰인 시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고려말~조선초의 나옹선사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이 시를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유학을 떠난 후 처음으로 한국에 나가서 여기저기 변한 모습들을 보고 다니다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 들렀더니 어느 서예가의 서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전시장에서 한글 궁체로 쓴 위의 시가 눈에 띄어 베껴 왔다. 그 후 이 시는 나의 애송시가 되었다. 전형적인 시조는 아니더라도 시의 내용이 아름답고 운율이 시조 성격을 띄어 이 시조 선집에 넣었다.

 

 이 노래를 지은 나옹선사는 이성계를 도와 지금의 서울을 조선의 수도로 정하는데 큰 도움을 준 정치스님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무학이 젊은 시절 원나라에 갔다가 거기서 나옹선사를 만난 그의 제자가 되었다. 무학대사의 아버지는 안면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드는 장인(匠人)이었는데 천민이라고 나옹의 제자들이 무학을 제자로 받아드리기에 반대하였다. 나옹의 제자가 되기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말이다. 무학대사를 이성계의 왕사로 추천한 것도 나옹의 추천이었다고 전한다.

 

 무학과 나옹은 다음과 같은 일화 한 토막이 전해온다.

 이덕일의 <조선왕을 말하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려 공민왕 9년 부친이 사망하자 이성계는 명당(明堂)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마침 사제 사이인 두 승려가 명당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것을 소문으로 들었다. 스승이 동산을 가리키며 “여기에 왕이 날 혈(穴)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고 묻자 젊은 종이 세갈래 중에서 가운데 낙맥인 짧은 산 기슭이 정혈인 것 같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스승은 “네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구나. 오른편 산기슭이 정혈이다.”라고 바로 잡아 주었다. 하인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이성계는 말을 달려 뒤쫓아 함관령 아래서 두 승려를 만났다. 이성계가 극진히 대접하면서 장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노승이 산에 지팡이를 꽂으며 첫째 혈(穴)에는 망후(임금)이 날 자리고, 둘째 혈은 장군과 재상이 날 자리라고 했다. 노승이 나옹이었고 젊은 제자가 무학이었다 한다. 이성계가 왕이 날 혈을 택하자 나옹은 이성계를 보며 “그거 너무 지나치신것 아닙니까”하였다 한다. 부친 장지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성계는 25살에 벌써 나라를 세울 꿈을 꾸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술을 취케 먹고 오다가 공산(空山)에 지니

뉘 날 매오리 천지즉금침(天地?衾枕)이로다

광풍(狂風)이 세우(細雨)를 몰아 잠든 나를 깨이다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아무도 없는 빈 산에 쓰러져 잠이 들었네. 누가 잠이 든 나를 감히 깨우겠는가. 천지가 곧 배게요 이불인 것을. 갑자기 바람이 불어 가랑비를 몰고와 잠이 든 나를 깨우네.’

 

 위는 송당(松堂) 조준의 노래다. 조준은 아들이 태종 이방원의 딸과 혼인함으로서 태종의 사돈이 되었다. 원래는 별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 증조대에 이르러 몽고어를 잘해서 통역관으로 출세, 고려 충권왕의 장인이 되면서 귀족이 되었다 한다.

 

 조준은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측근이 되어 정도전과 함께 토지개혁에 앞장 섰다. 1, 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 이방원 편을 들어 영의정 부사로 올랐다. 토지제도에 조예가 깊어 하륜등과 함께 <경제육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저서에 <송당집>이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500년의 수도 개성을 한 필의 말을 타고 찾아와 보니 산천은 옛날과 다름이 없으나 사람들은 갈 곳을 알 수 없구나. 아! 태평스럽던 지난 날의 영화가 한바탕 꿈이었구나!

 

 위의 시조는 고려의 대학자 야은(冶隱) 길재의 탄식이다. 엣 수도 개경에 가서 느낀 감회를 읊은 시로다. 성낙은의 <고시조 산책>에는 다음과 같은 야은에 관한 일화가 적혀있다. 야은은 절의와 효행등 유학의 실천자로서 실천학문을 소중히 여기고 사장(詞章)은 그리 힘쓰지 않았다. 그는 또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를 강조하였다. 이에 대한 강조가 어느덧 여염집 규중에 까지 침투되어 약가와 같은 열녀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약가는 어느 농부의 딸이었는데 그는 시집을 가서 남편이 3년을 기약하고 전방으로 징집이 되어갔다. 손꼽아 기다리던 3년이 지나 6년이 되어도 남편은 무소식이었다. 친정에서는 사위가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약가에게 개가(改嫁)할 뜻을 권했다.

 

 그러나 약가는 “우리 마을의 길선생은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몸은 길선생의 가르침에 다른 바가 없으니 조금도 걱정마십시오”하며 시부모들을 정성껏 모셨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꿈에도 잊지못할 남편이 8년만에 돌아와서 약가의 원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선산군 고아면 봉한동에 있는 야은의 백세청풍(百歲淸風)비와 나란히 서있는 팔년고등비(八年孤燈碑)가 바로 약가를 칭송하기 위한 비석이다.

 

 야은이 간지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사람들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나를 챙기는 사람 중에 진정으로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다”고 금슬 좋음을 자랑하던 부부도 배우자가 죽고 1년이 못가서 재혼한 새 배우자의 손을 잡고 다정한 부부가 되어 다니는 세상. 그야말로 셰익스피어(Shakespeare) 연극 햄릿(Hamlet)에 나오는 구절 “상여를 따라가는 눈물도 마르기 전에” 재혼을 서둘러서 신혼의 단 꿈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많지 않던가.

 

 야은 길재는 영남학파의 비조(鼻祖: 태생 동물은 코가 제일 먼저 형성된다는 말로 어떤 일의 시조를 이름)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이어받아 정몽주 -> 길재->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로 불리우는 학맥형성에 빠질 수 없는 징검다리 역활을 했고 이 영남학파는 퇴계(退溪) 이황에 이르러 학문적으로 활짝 핀 동백시대를 맞았다.

 

 영남학파는 영남 출신 선비만이 영남학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라도 해남의 고산(孤山) 윤선도, 경기도의 다산(茶山) 정약용 같은 선비도 영남학파에 속한다. 이 학파의 특색은 절의(節義)를 중히 여기고 사장(詞章)을 중하게 여긴다는 데 있다. (202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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