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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落伍者)
leed2017

 

 몇 주 전 일이다. 신문에서 우연히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어느 신문사 기자 한 사람이 북한 여러 곳을 다니며 경치도 보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들과 이야기 나눈 것을 적어서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도 한 번 읽어 봤으면… 하루는 그 책을 구하려고 우리가 사는 콘도미니엄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H초급대학 구내서점엘 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내가 신문을 통해 알고 있는 책 이름과 저자의 성(surname)이 전부였다. 책 주문을 맡고 있는 직원의 말이 저자의 이름(first name)을 모르고 달랑 성(surname) 하나만 가지고는 책을 구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옛날 W대학에 있을 때 대학서점에 가서 책을 주문하던 버릇대로 ‘출판될 책(Books in Print)’이라는 사전류의 책을 보여 달라고 했다. ‘출판될 책’은 미국에서 출판되는 모든 책에 관한 정보를 적어 놓은 사전류의 책이니 이것을 뒤지면 저자의 이름은 물론 책값까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직원은 내 말 뜻을 잘 못 알아듣겠다는 듯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는게 아닌가. 나는 고객으로서 ‘서점 생리는 훤하게 알고 있다’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설명’을 했다. 내 용감무쌍한 설명을 다 듣고 난 직원의 말이, 내가 찾고 있는 ‘출판될 책’ 따위는 옛날, 그 옛날 것으로 없어진 지가 오래라는 것. 별 이유도 없이 기고만장 하던 내 사기(士氣)가 이 말 한 마디에 폭삭 내려앉고 말았다. 나의 무식이 저지른 KO패.


 지금은 컴퓨터 시대다. 이미 구식이 되어 자취를 감춘 지가 벌써 십수 년이 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H대학 서점에서 호랑이 담뱃대를 찾은 이 멍청이.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바보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렸다고 생각하니 몹시 창피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옛날부터 나는 컴퓨터와는 담 쌓고 사는 컴맹이다. 아무리 천하의 컴맹이라 해도 소위 대학교 교단에 섰다는 사람이 이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니. 지난 10년 동안 책을 주문할 때 언제나 남의 손을 거쳐 주문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그럴듯한 핑계가 못 된다. 아무튼 대단히 무식한 선생이란 말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컴퓨터 키를 몇 번 토닥토닥 두드리면 책에 관한 정보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니 무척 편리한 세상이다. 책 주문뿐이 아니라 옛날 같으면 한나절은 꾸물거랴야 할 일을 컴퓨터가 몇 분 안에 해결해 버리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이 손발을 놀리는 일이 줄어드니 일에 대한 정(情)이나 애착도 줄어드는 것 같다.


 컴퓨터가 사람 일을 대신하면서 더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더 다정해졌다든지 부드러워졌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컴퓨터 응용이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스며들면서 거기에서 오는 두려움과 소외감은 늘어간다. 컴퓨터로 일을 처리하는 데는 심리적, 신체적 ‘투자’가 비교적 짧고 적다. 따라서 그 일에 대한 ‘정(情)’ 이랄까 ‘애착’도 상대적으로 적기 쉽다. 심신(心身)의 ‘투자’가 큰 일을 하고 나면 투자 크기에 걸맞게 그 일에 대한 의미와 긍정적인 사후 평가도 증가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더 큰 만족감을 느끼고 그 여운도 오래 남는 것이다.


 요즈음 나는 내 자신이 ‘문명의 낙오자’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지금이라도 노력해서 대열에 같이 끼어 들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사람이 가라오케 반주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것은 딱 질색이다. 반주가 사람 노래에 맞추어야지 사람이 어떻게 반주에 맞추어서 노래를…. 마찬가지로 컴퓨터가 사람 일을 통째로 떠맡는 것도 환영하지 않을 때가 많다. 컴퓨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냉장고 없던 시절에 어떻게 살았나 그 시절을 궁금해 하는 것처럼, 컴퓨터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것 같은 그런 자세이긴 하지마는….


 엊그제는 한국 어느 소설가가 자기는 컴퓨터를 외면하고 아직도 육필(肉筆)이라는 말을 들으니 객지에서 무슨 혁명동지나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집사람이 뒤에서 소리를 지른다. (20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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