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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해의 취상(贅想)
leed2017

 

 또 한 해가 저문다. 온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달력이 후딱후딱 넘어가더니 앞으로 몇 밤만 자면 새해란다. 


 10대, 20대 젊은 시절에는 나도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도 어른이 되어 술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어른이 누리는 복락은 다 누리고 싶었다. 예쁜 아내와 좋은 집에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귀여운 자녀들을 거느리고 싶은 생각… 


 이런 생각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소원이겠지만 그때 나는 세상 물정 모르고 이런 진부한 생각은 의대나 법대를 지원하는 아이들이 많이 가지는 고리타분한 생각으로 치부해 버렸다. 큰 오산!


 그렇다고 나는 진보적이고 번듯한 일생을 꿈꾸는 젊은이도 아니었다. 그저 밥이나 먹고 하릴없이 이러저리 쏘다니기만 하는 거리의 건달. 대학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아이들 몇 명이 함께 손잡고 사회운동을 하자며 접근해 왔으나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대학교 3학년 때 4.19가 터졌다. 그날 수업은 모두 폐강이 되고 우리는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교 공부가 지옥보다도 더 지루하고 싫던 나에게는 신이 내린 선물. 부정투표가 있었고, 마산 항쟁이 일어나고, 경찰 손에 죽은 김주열의 시체를 바다에서 끌어올렸다고 야단들이었으나 나는 별다른 의분도 느끼지 못했다. 


 참으로 시대의 지진아(遲進兒)요, 정의감이라든가 사회적 책임이나 의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없는, 그저 하루 세 끼 밥만 축내는 ‘식충’이었다.


 그런데 우리 데모대가 경무대 가까이 갔을 때다. 경찰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쏴대자 경상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 같은 반 학우가 된 조용한 친구 하나가 ‘무기고에 불 지르러 가자’고 내손을 잡아 끄는게 아는가. 나는 겁이 나서 “그런 위험한 짓은 안 하겠다”며 거절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내 모교의 영어교사 자리에 동렬이 너를 약속 받았다”며 그 고등학교 이사진과 두터운 교분을 은근히 뽐내셨다. 나는 한 마디로 이를 거절했다. 내 살 길은 내가 해결해야지… 그 대신 나는 두 가지 일에 정력을 기울였다. 첫째는 틈만 있으면 동방연서회에 가서 붓글씨를 익히는 일이요, 둘째는 가정이 불우하여 정규 중고등학교에 못가는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아서 1년 조금 넘게 봉사를 했다. 내가 바로 ‘상록수’의 주인공 같은 생각을 하니 속으로 우쭐해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운동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피 뜨거운 청년 같았으면 그 때의 경험이 시민 운동가로서의 좋은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리한 관찰력도 성의도 없는 그저 평범한 몽상가에 지나지 않았다.


 4.19때 무기고에 불 지르러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던 친구는 어느 대학교에 평범한 교수로 있다가 나보다 1년인가 2년 먼저 은퇴를 했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53년 전 무기고에 불 지르러 가자고 내 손을 잡던 녀석이 지금은 소위 극우로 완전 전향을 했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가서 국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을 때 술집에서 인턴 아가씨와 술을 마셔 문제가 된 청와대 홍보실 Y씨의 실수도 좌파 종북세력이 쳐놓은 덫에 Y씨가 걸려든 것이라는 요지의 전자우편을 내게 보내 올 정도로 극우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50년이 흐른 사이에 일가친척,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어쩌다가 나만 찬바람 부는 캐나다에 남아 있다. 외롭다. 이 나이에 좌파 우파 따져 뭘 하겠다는 것일까.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것이다. 그때 우리 가슴을 데워 줄 따뜻한 일이라도 생길까. 


 목숨이 위태로워질수록 늙은 어부는 하늘의 별을 헤인다고 한다. 어디 우리도 몸을 건강하게 지키며 기다려 보자. 설사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줄 좋은 일은 오지 않더라도 기다린 덕분에 신체적 건강은 지킬 수 있었을 테니 큰 손해 본 것은 없지 않는가.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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