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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애증(愛憎) 산맥
leed2017

 바야흐로 가을, 결혼의 계절이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결혼식이 예식장에서 이루어지지만 캐나다에서는 교회나 성당, 아니면 절(사원)에서 이루어진다.

 캐나다에서는 결혼식 주례는 주로 성직자들의 몫이지만 한국에서는 신랑 신부의 은사나 선배, 요새는 신랑 신부의 친구들도 주례 단상에 오른다. 주례는 보통 10분 이내에 신랑 신부가 일생동안 간직해 둘 말을 하되 하객들에게 지루한 느낌이 안 들도록 해야 한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 열 번 넘게 주례를 서 봤으나 주례사를 짧게 끝내야 한다는 조건에, 재미있게 해야 된다는 압력까지 따라 붙으니 여간 스트레스 받는 일이 아니다. 재미있게 한다고 코미디언처럼 손님 웃기는데 주목적을 둘 수도 없고, 일생에 단 한번밖에 없는 인륜대사()라고 장례식 분위기의 엄숙한 주례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례는 너무 가볍게 굴어도 탈, 너무 무겁게 굴어도 탈, 그 양극 어디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에게는 평생 결혼생활이 오늘 같은 거울 같이 잔잔한 물위를 미끄러져 가는 돛단배-. 이 세상은 동화의 나라, 꿈속의 나라이다. “살아봐라마는 너희들도 오늘같이 근심 걱정 없는 날이 평생에 며칠이 안 될끼라…”는 음흉스런 저주가 떠오를 때는 불초소생 이 주례님께서도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나의 멘토 시인 C씨는 결혼을 대나무에 비유해서 세 마디만 무사히 넘기면 그 결혼생활은 성공이라는 것. 나도 C씨처럼 결혼생활을 옛시조 나누듯 초(初), 중(中), 종(終) 세 단계로 나누기를 좋아한다. 결혼 생활의 초장은 애정()이랄까 사랑이 그 중심.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언제 어디서나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주례사의 압력은 모든 배우자의 투정과 응석도 ‘애정행각’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사람은 빵만 가지고는 살 수 없듯이 부부는 사랑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두 사람 간에 부대낌, 즉 상호작용이 아닌가. 사랑이란 것도 알고보면 각가지 조건과 계략, 잔꾀와 음모가 복병처럼 숨어있는 덤불 속. 조건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부부사이에도 준 것만큼 되돌려 받기를 은근히 바라고 던져 본 투정과 응석에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는 실망이 따른다. 배우자의 자기에 대한 정열이 식어갈 때는 사랑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질투와 미움이 싹튼다. 실망과 미움이 쌓이면 원망이 되고, 원망이 쌓이면 원한()이 되는 것.

 결혼 초기에는 정(情)이 생겨 쌓이게 되면 큰 다행. 정(情)이란 기쁜 일을 당해서나 슬픈 일을 당해서 감정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부대낌에서 오는 것으로  결혼 중년의 안정과 말년의 낙(樂)이 둥지를 틀 터전이 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부부간 사랑이다. 부부란 가까운 듯 하면서도 아득하게 먼 남으로 느껴질 때가 있고 멀리 있어도 바로 옆에서 이마를 맞부딪칠 정도로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제 한 여름 오동잎 같이 넉넉하고 풍성하던 애정이 식으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흐려진다. 그렇다고 서로 관심조차 없어진 것은 아니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던 모든 시그널(signal), 즉 ‘애정행각’이 물밑으로 가라앉은 것 뿐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결혼 후 1년이 지나면 애정표시의 시그널들이 반으로 줄어들고, 4년이 지나면 이 시그널들은 거의 사라진다고 한다. 하물며 4~50년 이어온 결혼생활에야---.

사랑이 어떻더나 / 길더냐 짜르더냐 / … / 지극히 긴 줄은 모르나 / 애 그칠만 하여라

 위의 옛 시조를 보면 우리 선조들도 사랑의 원리에 대해서 무척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100년, 200년이 지나도 사랑의 정체에 대한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안개속이다. 결혼생활의 마지막 단계에 가면 두 늙은이가 한 지붕 밑에서 살면 하루종일 서로 말 한마디 없어도 마음이 가라앉고 태평하다. 자식들에게 “니 애미 어디 갔노?”하고 묻는 것이 곧 서양 사람들의 “I love you.”다. C씨가 말하는 결혼의 낙(樂) 단계다.

 C씨의 결혼 3단계는 한 쌍의 원앙새 같이 사이가 좋고 사랑하던 원앙지애(鴛鴦之愛)의 신혼에서 시작, 거문고가 울면 비파도 따라 우는 금슬지정(琴瑟)의 중년을 거쳐 종과 북이 서로 장단을 맞추며 연륜을 쌓아가는 종고지락()에 이르러 어느덧 찾아온 늙음은 죽음의 저쪽까지 낙생()의 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종은 늙을수록 그 울음이 푸르고 북은 나이가 더할수록 그 울림이 그윽하다고 하다는데 요새는 현대의학의 힘을 빌려 칠, 팔십이 되어도 ‘인생은 70부터’라고 외치는 소리가 저 멀리서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또 다른 종고지락이 있다는 말일까? (20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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