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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大家)
leed2017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다. 중학교 때 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그리는 소묘(小錨: dessin) 시간에 한 번도 잘 그렸다고 칭찬받거나 우리 반 수작(秀作) 10개에도 뽑히질 못했다. 그런데다가 한번은 야외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안 계신 줄 알고 큰 소리로 선생님 욕을 한창 하는데 내 바로 뒤에서 듣고 있던 선생님으로부터 출석부로 내 두개골을 도끼로 쪼개는 것 같은 기습을 받았다. 돌대가리였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지 싶다. 그 후로 미술시간은 나의 원수. 내가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인가 L 선생님은 어느 대학교로 자리를 옮기시더니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화가가 되었다.


 대학교 다닐 때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께 붓글씨를 배우던 나는 해마다 10월이 오면 경복궁에서 열리는 국전(國展)에 가곤 했다. 심산(心汕) 노수현, 청전(靑田) 이상범 등 여러 대가들의 산수화가 좋아서 서예 전시실에도 오래 머물던 생각이 난다. 나는 특히 청전의 산수화를 좋아했는데 요새는 화풍(?風)이 많이 달라져서 옛날의 청전 산수화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드물다. 몇 십 년 전 토론토에 사는 청전의 제자로 알려진 여류화가 K씨를 통하여 청전풍의 산수화를 가끔 볼 수 있었는데 요즈음은 그런 작품을 내놓는 화인(?人)도 없는 것 같다.


 국전 서예실에 발을 들여 놓으면 일중(一中) 김충현, 검여(劍如) 유희강, 원곡(原谷) 김기승, 구룡산인(九龍山人) 김용진, 여초(如初) 김응현 같은 대가들의 작품이 주위를 압도하였다. 나와 동학(同學) 박준근 군은 우리들 또래 집단을 훌쩍 뛰어넘어 저만치 앞에서 천재성을 번뜩이던 유망주. 그러나 그는 조선 말기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천재작가 전기(田畸)를 닮았는가,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시서화일체(詩書?一體)라는데 나는 원통하게도 화(?)가 짧으니 서예인으로서 대가(大家)가 될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서예인으로서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것은 이공계 학문을 전공하는 학생이 수학을 잘 못하는 것과 같고 권투선수로서 잽(jab)을 못넣는 것과 같다. 


 한말의 서화가로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요, 신문 <동아일보(東亞日報)> 제자(題字)를 쓴 위창(葦滄) 오세창 같은 이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 각(刻) 등 그가 원하는 거의 모든 것에 재능을 내려받았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엄지손가락 하나 제대로 그리는 재능도 주질 않았으니. 불공평하다. 하늘이여!


 그림이나 글씨 얘기를 하면 왕희지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서성(書聖)으로 불리던 왕희지는 그가 우군(右軍) 장군 벼슬에 오른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절강성 산음지방에 있던 정자 난정(蘭亭)에서 곡수연(曲水宴)을 연 적이 있다. 곡수연이란 경주의 포석정 같이 물이 굽어 흐르게 만들어 놓고 술잔이 자기 앞으로 꾸불꾸불 떠내려 오는 동안 시를 지으며 노는 선비 계층의 연회를 말한다.


난정에 모인 사람 40여 명의 시(詩)를 모아 펴낸 시집(詩集)에 왕희지가 행서로 서문을 썼으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난정서>이다. 왕희지가 죽자 <난정서>는 그의 7대손 지영선사에게로, 지영선사에서 다시 변재선사에게로 갔다.


 한편 당 태종은 은밀한 수소문 끝에 변재선사가 그 <난정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몰래 첩자를 보내서 그 <난정서>를 훔쳐왔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변재선사는 화병으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열흘 만에 죽었다 한다. <난정서>를 손에 쥔 태종은 늘 그것을 즐기며 감상하다 죽을 때 자기 관에 넣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죽었다. 그 때문에 천하보물 <난정서> 원본은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조선 세종 때 서예가 최흥효라는 선비는 그가 글씨로 유명하게 되기 전 어느 과거 시험장에서 답안지를 쓰다가 우연히 왕희지 글씨와 비슷한 글자를 썼다고 스스로 생각, 과거 시험지가 아까워 내지 않고 집으로 가져왔다는 일화가 있다.


 나는 <난정서> 원본을 잃고 화병이 들어 죽은 변재선사나 <난정서>를 훔친 당 태종, 왕희지 글씨와 같은 글자를 썼다 하여 과거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고 집으로 가져와버린 최흥효 모두가 예술에 대한 열정은 이해가 가지만 어딘가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은 금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예술에 대한 내 감각은 무디다. 


 그러나 기회가 있으면 미술관을 찾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스스로 다짐은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을 구태여 토론토 공항 근처에 자리잡은 이유의 하나도 즐겨 찾던 맥마이클(McMichael) 미술관이 퍽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매주말이면 맥마이클 미술관에 가서 그림 구경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그림같은 풍경. 


 그러나 막상 이사를 오고 나니 매주 한 번은 커녕 일 년에 한 번 가기도 어려웠다. 이제는 한국에서 손님이나 오면 거길 갈까. 우리 스스로 가는 법은 없다. 그러니 회원권(membership)은 겉멋으로 가지고 다니는 장식품이 되었다.


 음악이고, 미술이고, 무용이고, 서예고... 예술은 정서의 표현. 예술에 대한 관심이 멀어질수록 우리의 정서도 가뭄에 논밭 갈라지듯 황페하게 된다. (20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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