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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내기
leed2017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을 일주일 앞둔 어느 한가한 날이었다. 10층에 사는 H형, 우리 동네에 살다가 M시로 이사를 한 C형 그리고 이웃 동네에서 놀러 온 S형. 이렇게 네 집이 점심을 한 적이 있다. 물주(物主)는 H형. 그 자리에서 세 밤만 자면 있을 한국과 일본의 올림픽 동메달을 놓고 벌어질 시합은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다. H형과 나는 일본을, C형과 S형은 한국의 승리를 점쳐서 예측은 2:2로 갈라졌다. 이런 일에는 하루종일 시비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법. 점심내기로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의견이 엇갈릴 때는 냉면 한 그릇 내기로 처리하는 저속한 버릇이 있다. 지금까지의 나의 승률은 7전 6승 1패. 비교적 높은 승률을 은근히 뽐내고 있던 차였다. 나는 일본의 승리를 꺼내는 바람에 억지 춘향격으로 매국노가, C형과 S형은 한국의 승리를 예언함으로써 애국지사가 되고 말았다. 냉면 한 그릇 때문에 적과 동침을 해야 하는 비극. 언젠가 어느 영화에서 본 장면 "부모를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부모가 우는" 꼴이 됐다. 애국심으로 국산 자동차를 살까, 아니면 이기심(利己心)으로 외국 차를 살까 고민하는 갈등 상황과 비슷하다.


 애국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애국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은 천태만상, 도저히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한국에 나가 있을 때였다. 하루는 퇴근길에 학생들이 반미 데모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데모에 참여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나이키(Nike) 운동화를 신고 하나같이 이스트 팩(East Pak)인가 하는 당시 미국 상품으로 한국 학생들에게 유행했던 가방을 메고 있는게 아닌가. 이를 보는 순간 내 머리를 스쳐간 생각은 "얘들이 재미로 저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생각은 10여 년 동안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미제 운동화와 미제 가방을 메고 반미운동을 한다고 그들의 운동에 진정성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가정이지 현실은 아니다는 결론에 이르고서야 내가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하여 느끼는 생각과 외부로 표출되는 행동은 실로 복잡하다.


 애국을 소리높여 외치는 애국지사들의 행동을 보면 실망할 때가 많다. 이들 우국지사 중에는 세금 포탈로 구속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뇌물을 주고 받다가 걸려든 사람, 성희롱으로 고소를 당한 사람, 사기행각을 하다가 철창신세를 진 사람 등 별별 사람이 다 있다. 요컨대 행동면에서는 우리네와 눈꼽만큼의 차이도 없다는 말이다.


 애국을 한다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한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위험하다. 애국이란 말은 입에 올리지 않더라도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자기 직업에 충실한 말없는 풀뿌리 시민들도 애국지사들인 것이다.


 한국에 가면 피 뜨거운 애국지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매우 든든한 일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들이 외치는 구호가 때로는 지나치게 뜨겁고 좁디좁은 견해를 내세운 독선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예로 "독도가 우리 땅인지 의심이 가는 사람은 친일의 찌꺼기" 같은 구호는 지나치게 단세포적이고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구호이다. 우리가 진정 민주사회를 지향한다면 이 정도의 다른 견해는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신문을 보니 일본 어느 대학교수 두 사람이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고 대한민국 땅"이라는 요지의 책을 따로 따로 출간했다는 기사가 났다. 틀림없이 이 두 교수의 주장을 못마땅해 하는 일본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교수의 주장에 일본 어느 구석에서도 눈에 띄는 반대 의견의 소동(騷動)은 없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어느 교수가 "독도는 한국 영토가 아닌 것 같다"는 책을 썼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무사할까? 우리에게는 물질적 풍요도 중요하지마는 나와 다른 의견도 풍요할 수 있는 아량이랄까 정신적인 여유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의 첫머리부터 "일본이 축구시합에서 이길 것이다.", "일본은 다른 의견을 수용하는데 우리보다 관대하다"느니 따위의 일본에 유리한 말만 하다 보니 정말 친일파로 몰려 따귀라도 한 대 올라올지 모르겠다.


 내기를 한 후 한 3주쯤 지났을까. 네 집이 어느 일식집에 가서 점심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물에 먹이가 걸렸다고 기고만장하던 7전 6승 1패 기록의 보유자 불초소생(不肖小生)도 풀이 죽을만큼 죽었다. 구렁이 알 같은 내 돈이 줄어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지만 우리가 이겼기 때문에 이런 내기는 열 번을 져도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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