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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락(三樂)
leed2017

 

 나는 2006년 은퇴를 하기 전까지도 친구들로부터 "너는 아직 철이 덜 난 녀석"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이 말뜻이 무엇일까? 세상 물정 모르고 사리판단에 어두운 사람이라는 말도 되고, 나잇값을 못하고 어리고 속(俗)된 짓을 하고 다니는 이를 농(弄)으로 일컫는 말도 된다. 아무튼 '정상(正常)'에서 이탈, 어딘가 좀 모자라는 사람이란 말이니 안 들었으면 더 좋을 말이다.


 그런데 나의 무의식적 생존 책략 때문인가. 나는 이 말 의미를 약간 비틀어서 젊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그러니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은 청춘이란 말에 가깝다는 뜻으로 본다. 해야 할 말, 해서는 안 될 말, 해야 할 행동, 해서는 안 될 짓을 분별없이 마구 하고 다니던 20대 청춘에서 좌충우돌 산 넘고 물 건너 70 고개까지 온 백전노장에게 '아직 철이 덜 난 녀석'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놓는 사람은 머리가 좀 잘못된 사람이 아닐까.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을 자주 듣던 시절을 돌아보기 위해 젊은 시절로 아니 돌아갈 수가 없다. 그때 이동렬은 오늘의 이동렬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지 싶다. 그때는 우선 남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몇 배 많았던 시절, 여기는 안녕하신가, 저기도 안녕하신가 공연히 얼굴을 내미는 데가 많았다. 대학교 때 농촌을 되살리겠다고 농촌사회연구회 회원으로 이름만 걸어놓고 달마다 열리는 모임에는 열번도 안 나간 이 속 빈 강정,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사나이.


 내가 한 가지 정성을 들인 것이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중학교에도 못 가고 구두닦이, 사환(使喚)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夜學)이다. 대학교 근처 어느 허름한 건물을 빌려 12명쯤 되는 청소년들을 모아 국사를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여명기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이 꿈꾸던 민족계몽이겠지 속으로 으스대면서. '계몽'이니 '민족'이니 하는 거창한 단어가 튀어나와야 할 이유도 없는데 '보기 좋은 떡 먹기도 좋다'고 우선 포장을 잘해서 그럴듯하게 보여야 한다는 허영심이 너무 커서 그랬지 싶다.


 내 젊은 시절의 객기(客氣)는 지금보다 훨씬 더 요란했던 것 같다. '철이 덜났다'는 말 대부분이 이때 나온 것일 거다. 무애(無涯) 양주동 선생의 <문주 반생기>에 나오는 젊은 시절의 호방한 기상을 흠모하여 '나는 언제 저런 호기를 부려보나.' 하고 생리적으로 잘 받지도 않는 술을 퍼마시고 부랑아처럼 이 골목 저 골목을 쏘다녔다. 강남에서 자라는 귤(橘)나무를 강북에다 옮겨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는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옛말이 있듯이, 무애 선생의 호기(豪氣)를 흉내를 내면 그것은 호기가 아닌 객기 아니면 치기(稚氣)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이 철없는 사내.


 이것저것 눈에 띄는 것은 다 해보고 싶은 것이 젊은 시절의 특권이다. 고등학교 때는 무용을 배우고 싶어서 무더운 여름밤 어느 가정집에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하는 무용 강습을 한 시간 넘게 훔쳐본 적이 있다. 그때 만약 내가 무용을 배웠더라면 후일 대성(大成)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남성 발레리나(ballerina)가 되었을지 누가 알랴!


 대학교 때는 대금(大?)을 배우고 싶어서 당시 비원 앞에 있던 국립국악원을 찾아갔으나 주머니 사정 때문에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나 대금이나 장구를 배우고 싶은 꿈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E 여자대학교에 있을 때도 장구를 배워볼까 생각했으나 이번에는 경제적 이유보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 내 나이 70. 먹고 마시고 노는 것 말고 다른 일에는 별 흥미가 없다. 얼마 전에는 독서클럽을 만들어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하여 토의를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흥미 없음'을 공표해버렸다. 이렇게 첫째 먹고, 둘째 마시고, 셋째 노는 삼락(三樂)) 위주의 '퇴폐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세상일에는 관심이 자꾸 줄어든다. 아침신문 세 가지를 읽는 데 2시간 걸리던 것이 이제는 1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정력적인 사람들은 '인생은 70부터'란 말을 외치며 새로 배우는 것도 많고 시작하는 일도 많다. 이들 정력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삼락(三樂)) 위주의 생활을 즐긴다. 물 빠지면 가재 나온다. 나이 들면 철도 따라 들겠지. (20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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