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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을 보면서
leed2017

 

 내가 올림픽에 관해서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가서 형님이 사준 어느 만화책에서였지 싶다.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으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서윤복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 나갔는데 큰 개[犬] 한 마리가 서(徐) 선수에게 달려들기에 서 선수는 뜀박질하랴, 개 피하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다는 이야기. 올림픽에 나간 적도 없는 서윤복 선수에게 올림픽 마라톤이 웬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보스턴 마라톤이 올림픽 마라톤으로 둔갑한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내 장기 기억에는 올림픽 마라톤으로 저장되어 있다. 기억이란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다른 기존의 기억에 흡수, 용해되어 왜곡, 변혁,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알면 보스턴 마라톤이 올림픽 마라톤으로 둔갑했다는 것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요즈음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보느라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켜놓고 있다. 올림픽 구경은 흥미, 재미 모두 만점이다. 무슨 경기든 간에 선수들이 지금까지 뼈를 깎는 고생을 하며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메달을 거머쥐어야 한다는 집념으로 최후의 결전에 임하는 처연한 모습을 보면 안쓰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또 어떤 운동경기, 이를테면 모자를 쓰고 신사복 윗도리를 입고 말[馬]을 타고 장애물을 넘는 equestrian(마상마술이라던가?) 같은 운동경기는 "사람이 말[馬]을 등에 업고 장애물을 뛰어넘는다면 혹 모를까 선수가 말 위에 떡 버티고 앉아서 말을 호령하며 장애물을 뛰어넘는 경기가 말의 경지지 어찌 사람의 경기가 되랴!" 퍽 싱겁다는 생각이 든다.


 "내 혼(魂)이 어디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데 올림픽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까. 한국 선수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입장하거나 시상대에서 태극기가 올라갈 때면 콧등이 시큰해 오는 것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아무리 북한이 우리에게 두통거리라 해도 북한도 우리 가족이라는 것은 올림픽을 보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나를 두고 종북세력이라 해도 좋고 이북을 따르는 빨갱이라 해도 좋다. 이때는 남한 국민 대부분이 종북 세력이요 빨갱이가 되지 싶다. 북한 선수를 응원하는 것은 남한 북한이라는 개념 이전의 원초적인 반응이요 정서다. 그 감정이란 논리적, 이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무릎을 작은 고무망치로 가볍게 치면 다리가 즉각 올라가는 반사작용, 영어로 말하면 knee-jerk reflex(슬개반사)처럼 나오는 감정의 원액(原液)이다.


 요 며칠 전에는 북한과 쿠바 선수의 유도 경기가 있었다. 정규시간 안에 승부가 나지 않아 연장전에 들어갔는데 북한 선수가 천신만고 끝에 이겼다. 선수가 우는 것을 보니 나도 덩달아 눈물이 어찌나 쏟아지는지 혼이 났다. 같이 보던 아내는 "기운은 해마다 줄어가는 저 울보가 앞으로 어떻게 세상 풍파를 헤치며 살아갈까?" 은근히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도 속으로는 울었겠지.


 올림픽은 젊음의 향연. 분출된 젊음의 패기는 용암처럼 도도하게 올림픽 경기장을 덮는다. 배구 같은 경기에서는 말[馬]만 한 처녀들이(처녀겠지) 물찬 제비같이 날렵한 몸놀림을 보여주는가 하면 체조 경기에서는 아직도 화장실에서 엄마를 연상 불러댈 어리디어린 소녀들이 온갖 귀엽고 신기한 몸놀림을 보여준다. 올림픽은 분명 젊은 사람들에게는 젊음의 기쁨을, 늙은이에게는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은 듯한 착각 속으로 몰아넣는다. 승리의 기쁨에서 오는 눈물이든 패배의 아픔에서 오는 통한의 눈물이든 눈물은 인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 생각 없이는 눈물이 없고, 눈물 없이는 기쁜 감정은 물론 슬픈 감정도 없다.


 내가 보는 올림픽 관전(觀戰) 응원 기준은 일반적으로 약자(弱者) 편이다. 가령 흑인과 백인이 맞붙었을 대는 흑인을, 티베트(Tibet) 같은 약소국이 미국 같은 강대국과 승부를 가릴 때는 약소국 선수를 응원한다. 중국이나 일본 같은 동양국가가 영국이나 독일 같은 서양국가와 겨룰 때는 동양국가들이 이기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국, 북한, 캐나다가 승부를 겨룰 때는 무조건 한국, 북한, 캐나다를 응원한다. 그러고 보면 나의 ‘약자 편을 응원하는 이 고매한 평등주의 정신’도 알고 보면 ‘우선 내 주위 사람부터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을 돌봐주자’는 수작. 가족주의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하는, 실로 얄팍하고 가증스러운 평등주의 정신에 지나지 않는다. (20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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