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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 살어리랏다”
leed2017

 

 해를 보내며 붓글씨 하나와 거기에 따른 짤막한 글 한 편을 보내달라는 신문사의 청탁을 받고 무엇을 쓸까 생각을 해봤다. 


 "힘차게", "희망 속에서 웃음을 잃지 말고", "인내로 용맹정진", "황소처럼 튼튼하게" 따위의 듣기 좋은 꽃노래는 여러 번 불렀고 올해에도 내가 아니더라도 이 말을 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것같은 생각이 들어서 소재 찾기의 방향을 서정적인 쪽으로 돌렸다.


 도덕적이고 훈계적인 말을 싫어하는 데다가 밝고 힘찬 구절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서정적인 구절밖에 더 없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한문 구절은 피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작자 미상의 노래부터 시작해서 옛시조, 현대 시(詩)를 뒤적였으나 마음에 꼭 드는 것이 눈에 띄질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위에 적은 고려 때의 속요 [청산별곡]이 떠올라서 여간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금년 봄에 안식년으로 경기도 판교에 있는 정신문화연구원에 가 있는 동안 순천대학교 한약재료학과 교수로 있는 Y양의 초청으로 담양의 정자골과 순천에서 가까운 경상남도 하동(河東) 주위를 맴돌다 온 적이 있다. 


 하루는 순천 송광사엘 갔다가 해질 무렵에 그 절 뒤에 있는 법정(法頂) 스님이 기거하던 불일암(佛日庵)에 들렀다. 불일암은 [서 있는 사람들] [영혼의 모음] 등을 비롯한 법정수필 문학이 태어난 곳이다.


 주인은 가고 없는 빈 뜨락 밑으로는 후박나무가 한그루 서 있고 스님이 거처하던 허름한 한일(一)자 건물 벽에는 [청산별곡]을 적어서 걸어둔 현판이 하나 눈에 띄었다. 


 이런 산 속에 [청산별곡] 같은 노래가 벽에 걸려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공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방은 티 없이 맑고 무덤 속 같은 정적이 깔려 실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생각이 난다.


 [청산별곡]은 모두 8절로 고려 시가(詩歌)에서 공통적 주제인 생(生)에 대한 체념과 고독, 탄식과 허무, 은둔과 비애를 읊은 애절한 노래다. 깊은 산 속과 바닷가 어디를 헤매어도 이 마음의 공허를 메울 길은 없으니 덜 된 술이라도 마시고 싶다는 탄식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청산별곡]은 애처로운 노래만은 아니다. 김희보 님의 말처럼 이 애달픈 사연에는 해학이 있고 우수의 일면에는 낙천적이고 명랑한 기조가 있어서 실로 유연한 정조가 감도는 그런 노래다. 마치 아리랑을 슬프게 부르면 두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슬픈 노래가 되지마는 힘을 넣어 부르면 봄날 소풍 길에 나선 것 같이 신바람이 나는 그런 노래가 되는 것처럼.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 희열에 차 있는 사람이나 슬픔에 우는 사람,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 청산이 아닐까. 


 무의식 속에서 한세월 잊혀져 있다가 그 어느 날 하루 의식세계로 조용히 떠오른는 하나의 소원, 그것이 바로 우리의 [청산별곡]인 것이다.


 꿈속에서 맞았던 새해 무인년, 또 울며 웃으며 묵은해를 보낸다. 잘 가거라. (199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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