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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 묵연전에서
leed2017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있다가 월북한 미술평론가요 저명한 수필가인 김용준 교수의 주장을 따르면 성공적이니 예술가는 다음 3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그 첫째는 예술에 대한 양심이고, 둘째는 예술에 대한 사랑이요, 셋째는 고집이다. 예술에 대한 드높은 양심 없이는 격(格) 높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가 없고, 예술에 대한 열렬한 사랑 없이는 피나는 노력과 정신으로 큰 예술가가 되기 어렵기 때문. 마지막으로 고집 없이는 개성 있는 작품을 내놓는 예술가가 되질 못한다는 것이다.


 지난 7월 4일부터 10일까지 7일간 인사동 백악예원에서 '일중묵연전'이 열렸다. 일중묵연전은 1950년 파고다공원 맞은편 골목 관철동에 있던 동방연서회에서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선생과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선생의 공동 지도를 받던 문하생들과, 그 뒷날 일중 선생 밑에서 글씨를 배우던 문하생들이 정성을 모아 일중 선생을 승모하여 연 서예 잔치이다. 출품을 한 사람은 모두 54명이었고 전시 공간은 일중 선생 아드님의 배려로 이루어졌다.


 일중묵연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금부터 20년 전까지 그러니까 1982년까지 일중묵연전이 해마다 열려 왔다고 한다. 그때는 일중 선생 건강이 좋았고 작품 활동도 왕성하던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의 건강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인데다가 20년을 쉬었다 다시 열리는 전시회니 이번이 제1회 일중묵연전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같이 30~40년 전에 한 선생 밑에서 붓을 잡았던 제자들이 스승을 기려 이러한 회고전을 가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가슴 뿌듯한 감회를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생각해 보라. 낭랑 18세, 더벅머리 처녀 총각으로 관철동 서실을 드나들던 옛 글벗들이 벌써 백발이 성성한 중노(中老) 인생으로 접어들지 않았는가. 무정한 세월.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감명이 깊었던 것은 걸음마를 시작했던 초심자들이 이제는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경지를 개척해 나간 모습이 뚜렷했다는 것이다. 제각기 독특한 예술의 향기를 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여간 흐뭇한 일이 아니다. 


 개성이 없는 예술은 조화나 다름없는 것, 김용준 교수의 말처럼 그들은 예술에 대한 양심, 사랑, 고집을 골고루 갖추려고 애를 썼는가.


 전시장을 둘러보며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옛 서우들에 대한 생각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일찍이 서예에 대한 천재성이 번득이던 율리 박준근, 그리고 무척 부지런하면서도 재미를 느끼던 오천 이광범 두 사람이다. 달 따라 왔다가 구름 따라 간 그대들이여, 무슨 갈 길이 바빠 그리 빨리 갔는가?


 또 한 가지는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영원한 스승 일중 김충현 선생이다. 선생은 병환으로 그를 승모하는 이 잔치에 얼굴조차 보이지 못할 처지에 계시다. 보내 오신 소품 한 점을 보니 지금부터 6년 전, 그러니까 1996년의 작품이다. 그때 벌써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작품을 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일찍이 추사 김정희 선생이 기력이 쇠진한 상태에서 힘을 모두어 붓을 잡았을 때 손이 떨리고 글씨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을 본 제자들이 옆에서 '선생님, 글씨가 흔들립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추사는 "이 사람들아, 방 도배지가 반듯반듯하게 제자리에 있기만 하면 무슨 멋이 있나. 어떤 것은 바르고 어떤 것은 삐딱하게 있기도 해야지"라고 대답했다 한다.


 일중 선생은 한평생을 오로지 서예라는 외길을 따라 걸으신 분이다. 서예는 그의 인생이었고, 그의 인생은 곧 서예였다. 그 일중 선생이 이제 붓을 잡으시기가 불가능한 상태에 계시다. 그러나 당신이 대한민국 서예계에 심은 어린 나무들이 커서 이 나라의 서예계를 주름잡는 버팀목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신은 크나큰 위안과 자부심을 가지셔야 할 것이다.


 그 흔하디 흔한 말, 그러나 요즘 같은 사이비들이 날뛰는 세상에서야 백 번을 되뇌어도 시원치 않은 말, 즉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바로 일중 김충현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0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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