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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에서 바라본 행복(1)
leed2017

 

 몇 주 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어느 음악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한 사람이 무대에 나와서 청중에게 인사를 하고 활[bow]을 막 바이올린에 대려는 순간, 어디서 "삐르르르, 삐르르르. " 하고 핸드폰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순간 이 갑작스러운 '사건'에 놀란 바이올리니스트는 활을 내리고 "아줌마 빨리 전화 받으세요. " 하는 말을 내던지고는 무대 옆으로 휙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화가 나도 몹시 난 것이 틀림없다.


 지난해 8월 한국에 와서 이삿짐을 풀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이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였다. 이 요물은 실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전철, 버스, 기차는 말할 것도 없고 식당, 강의실, 극장, 화장실, 목욕탕, 어디 한 군데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공중장소에서 고막이 터질 듯 큰소리로 통화를 하는데(특히 경상도 아줌마 아저씨들 제발 좀 봐주셔요) 놀라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내버스에서 핸드폰으로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목이 터져라고 "냉장고 쪼꼬마한 냄비 안에 있는 콩나물국 뎁혀 머거레이" 하고 소리치는 어머니의 애정 어린 지시를 들으면 그런 고성능 전파를 타고 오는 어머니의 보살핌 한 번 받아보질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데 대한 억울함 비슷한 것도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핸드폰같이 편리한 문명의 이기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긴밀하고 가깝게 만들어 주는 데 도움이 될까 안될까, 더 길게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닐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텔레비전을 생각해보면 행복을 증진하는데 방해는 되지 않지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기 보다는 따로따로 떼어놓는 반(反)사회적 행동을 부채질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텔레비전은 사람들을 안방에 가두어 두고 여름밤 이웃집 아저씨와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친(親)사회적인 행동을 막는다. 동네 아이들도 집 밖에 나와서 저희끼리 와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모습은 점점 줄어가고 텔레비전, 아니면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 있는 외로운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지 않을까.


 텔레비전과 비교해서 핸드폰은 어떨까? 약간 길을 벗어난 이야기가 되겠지마는 일반적으로 진화 심리학에서는 동굴 속에서 살던 우리 조상들의 원시 태곳적 생활환경과 현대 환경의 엄청난 차이 때문에 현대인이 행복감을 느끼는데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진화심리학이란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진 모든 특성은 동굴 생활을 하던 원시 태곳적 환경에서 시작해서 수수만년을 내려오는 동안 정직성이나 책임감 같은 다른 모든 심리적 특성이 생리적 특성과 마찬가지로 생식과 번식에 필요한 진화 과정을 통해서 살아남은 진화의 마지막 결정체로 본다. 


 이런 심리적 특성들은 처음 원시.태곳적 환경에서 맹수나 천재지변과 질병에 시달리고, 다른 부족과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으나 현대생활에서 행복을 성취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견해이다.


 예로, 질투심이 그렇다. 질투심이란 태곳적 환경에서는 자기의 종자번식에 절대 필요한 성(性)적 파트너를 남에게 빼앗기거나 자기의 파트너가 몰래 남의 아이를 잉태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 생긴 특성이었다. 그런데 이 질투심은 자기 파트너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사람들이 자기의 성적 파트너를 남에게 빼앗기거나 남의 아이를 잉태했어도 별로 놀라지 않았던 사람들을 종족 보존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아직까지 하나의 잔재로 남아 있는 특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은 그 질투심 때문에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거나 잠 못 이루는 밤의 고통을 겪는 수가 있다.


 이것 말고도 태곳적 환경과 현대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현대인의 행복감을 방해하는 경우는 실로 많다. 예로, 태고 원시적 환경에서는 보통 50명, 100명의 혈육으로 얽힌 소규모 집단으로 살았으니 성(性)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르다. 10만, 100만의 무수한 사람들이 거대한 공간에 퍼져 살고 있고 성(性)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후보자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성관계는 늘어가는 반면 깊고 긴밀한 성관계를 줄어든다. 여기서 오는 정서적인 공허감도 현대인의 행복감을 방해하는 무시 못할 요소이다.


 게다가 텔레비전을 비롯한 각종 매스 미디어는 날마다 세계 정상급 미남 미녀, 정상급 운동선수, 정상급 음악가, 정상급 댄서 등 그야말로 한 나라 혹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정상급 음악가, 정상급 댄서 등 그야말로 한 나라 혹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정상급에 대한 사람들의 소개를 쏟아 놓는다. 원시 태곳적 환경에서는 우리 마을에서 ‘내가 제일 힘센 사람’이나 ‘얼굴이 제일 예쁜 사람’은 이제 그 나라 혹은 세계의 정상급과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될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나는 유능한 사람’이라는 뿌듯한 자신감에서 오는 행복감을 유지하기는 더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원시 태곳적 환경과 현대 생활환경의 차이 때문에 행복감이 방해를 받는다면 그에 대한 ‘대책’ 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늘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자주 해서 외로움을 덜게 함으로써 원시 태곳적 환경과의 차이를 좁히는 것일 것이다. 이 점에서 핸드폰은 크게 공헌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사람이 이제 몇 발짝만 더 가면 어디쯤 도착할 것 같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에서는 대화도 많고 빠르고 정확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좌우간 소위 핸드폰같이 문명의 이기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데 한몫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가?”에 명쾌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어떤 사람이 공자(孔子)를 보고 “선생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자 “야 이 사람아, 내가 삶[生]도 모르는데 죽음[死]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대답했다 하지 않는가.


 삶과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승의 삶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행복은 나 이외 다른 인간과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장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 없이 내 행복은 어려워진다. (200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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