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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우리글
leed2017

 


 해마다 5월과 11월이 되면 대학가에서는 논문 심사에 바쁘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1년에 석사 논문 2, 3편에 가뭄에 콩 나기로 박사논문 1편 정도면 끝이 났지만, 여기는 대한민국, 한 학기에 10편 내지 15편을 심사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니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대충 일고 논문심사장에 들어가는, 실로 교수로서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을 마구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못 느끼는 낯 두꺼운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학생들이 논문에 쓰는 단어나 문장형식이다. 한 마디로 학생들은 알아듣기가 쉬운 단어나 문장보다는 무슨 무슨 적(的)이니 하는 단어에 외래어까지 보태가며 될 수 있는 대로 거창하고 어마어마하게 들리는 표현을 즐기는 버릇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 연구는. "하면 될 것을 "본(本) 연구는. " 하거나 "논문 요약" 대신에 "논문개요(論文槪要)" "이렇게 생각한다" 대신 "이러한 사고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연구는 OOO가 맨 처음 했다"는 능동형 대신 "이런 연구는 OOO에 의해 맨 처음 연구되어졌다"는 수동형, "이러한 생각을 했다"는 말 대신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같은 참으로 알 수 없는 표현들이다.


 논문 뿐 아니라 청중을 향한 말을 들어봐도 별로 다를 게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기에다가 외래어, 특히 영어의 범람은 우리 말과 글의 존재를 위협하는 독소가 되고 있다. 예로 이수열 님이 쓴 [우리말 바로 쓰기]에서 빌려온 E 대학 L 교수의 [문화의 비상등 켤 때]라는 글을 보자. ". 모든 사람이 문화를 산소처럼 호흡하고 그 가치를 공유할 수 있게 하려면 문화를 이벤트화하여 감동을 나누고 멀티미디어 초고속 정보망을 통해서 . 문화 인프라라는 모뉴멘탈한 건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적 발상에서. 문화는 이미 만들어진 에르곤이 아니라 앞으로 창조해 나가는 에네르게이어야 한다. 문화네트워크에 새로운 콘텐츠를 부가하는 것이. " 한국 사람 몇 %가 이 말을 알아들을까?


 한 번은 이화여대에서 어느 집단의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에 "한국 전통문화의 근대 체험과 새로운 모색"이라고 써서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학생들 10여 명에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아직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왜 이렇게 어려운 말, 어려운 글을 좋아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세계문화와 조직]이라는 책을 쓴 Hofstede라는 사람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Hofstede를 따르면 세계문화 중에는 불안을 잘 참고 견디는 문화, 즉 불안회피지수가 낮은 문화가 있고 불안을 잘 참지 못하고 이를 피해가려는 문화, 즉 불안회피지수가 높은 문화가 있는데 한국은 불안회피지수가 높은 문화에 속한다는 것이다. 불안회피 지수가 낮은 문화에서는 아무리 어려운 생각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이나 쉬운 문장으로 풀어서 쓰는 사람이 환영을 받는다는 것. 그러나 한국처럼 불안회피 지수가 높은 나라에서는 어렵고 어마어마하게 들리는 말과 글을 써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다.


 학술논문에서도 쉽고 평이한 말을 쓰면 "학(學)적 무게가 없다"고 한다. 되도록 어렵고 어마어마하게 들려서 일반 사람은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어야 "공부를 많이 한 깊이 있는 학자"로 인정받는다 한다.


 이런 생각은 배웠다든지, 혹은 유식하다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도 존경받는 유교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종교학을 전공하고 이화여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최준식 교수에 의하면 세계 여러 종교경전 중에 배울 학(學)자로 시작되는 종교는 유교밖에 없다고 한다. "밥은 굶어도 자식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처럼 공부, 공부하는 나라도 없지 싶다. 배움을 중요시하다보니 너무 배워버렸는가 우리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늘어놓아야 자기가 유식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같이 생각한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말과 글이 이처럼 황폐한 쪽으로 변해가고 있을까? 우리말과 글이 이렇게 된 것은 대학강단에 서는 사람들, 특히 영어권 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나 방송언론인들에게 그 일차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다. 상아탑을 지키는 교수들은 쉬운 글을 쓰면 자기 글의 권위가 떨어지는 줄 아는지 필요 없이 거창한 말과 글, 여기다가 어려운 외래어를 마구 써가며 우리 글을 황폐화하는데 앞장서 왔다. 전적으로 교수들의 책임이라고 돌리기는 어렵지마는 또 하나 슬픈 모습의 하나는 영어권 원주민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한국식 영어 표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예로 음식점 벽에 붙은 '물은 셀프(self)입니다' '멘트(ment)' 같은 아리달송한 말부터 '레이블(label)'을 '라벨'로, '프로파일(profile)'을 '프로필'로 잘못 발음하는 경우이다.


 구태여 말이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리에게는 껄끄러운 표현은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 만큼 많다. 이를테면 "좋은 주말 가지십시오" "멋진 시간 되시길 빕니다" 하는 따위의 영어식 표현은 듣기에 여간 껄끄러운 말이 아니나 무슨 유식의 상징인 양 마구 쓰고 있다. 한 번은 어느 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자우편을 받았다. “. 근데 셤 결과 말이에여, 그게 맞는거에여? 이대로 가다간 전 쫓겨나겠어여, 섐에 대한 임프레션이 넘넘 좋았는데. 다시 할 수 있는거에여? 걱정되니 꼭 알려줘여. " 대학원 학생의 말이 '섐"은 선생님, '넘 넘'은 너무너무, '임프레션'은 인상, '. 거에여'는 요사이 젊은 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이지 결코 반말이나 존경의 의미가 빠진 말이 아니니 애교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자 하나라도 줄여보려는 전자통신 사용자의 피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말과 글은 한 문화의 정신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말과 글을 없애면 그 문화는 곧 죽고 만다. 캐나다에 가본 사람이라면 퀘백주에 사는 프랑스계 사람들이 퀘백주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영어는 알아듣고도 짐짓 못 알아듣는 척 불어를 고집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네들은 참으로 자기네 말과 글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과 애정을 느낀다.


 이대로 가다가는 100년 200년 후면 우리말은 오늘날 이 땅을 밟고 사는 한국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망칙한 언어가 되지 않을까 겁이 난다. 그 불행한 때는 토씨만 우리말로 되고 그 나머지는 외래어로 메우는 그런 불행한 시대가 아닐까 걱정된다. (200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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