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65 전체: 388,608 )
마음을 비울 수 있다면
leed2017

 

 오늘은 금요일, 좁쌀보다도 더 작은 눈가루가 아침부터 쏟아져 내린다. 이런 날은 집에 틀어박혀 게으름이나 잔뜩 부려보기에 딱 좋은 날.


 정민 교수가 엮어낸 <학산당인보>를 뒤적이다 보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참고해 두고 싶은 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학산당인보>란 학산당(學山堂) 장호가 중국 명(明)대 전각가(篆刻家)들의 짤막하고 시(詩)적인 경구를 새겨 둔 것을 모아서 엮은 책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인보(印譜)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조 때 이덕무가 <학산당인보>에 있는 글을 뽑아 한 권의 책으로 펴내면서 초정(楚亭) 박제가에게 그 책의 서문을 부탁했다. 초정이 쓴 서문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박제가의 저서 <궁핍한 날의 벗>에 실려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만약 이 인보에 담겨 있는 통곡하고 싶은 마음과 깜짝 놀랄 심정을 터득하게 된다면 천하의 기이한 글이라도 이 정도에 불과하고 옛사람들의 천만 마디 말도 이 정도에 불과함을 알게 되리라. 압록강 동쪽에서 책을 덤덤하게 보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말을 신뢰하는 자가 없음이 당연하구나, 아아!”
 <학산당인보>에 나오는 글은 그야말로 사간의심(辭間意深: 말은 짧되 뜻은 깊다)의 글들이다. 여러 가지 다른 글에서 뽑았으되 그 본뜻에 있어서는 한없이 간결하고 방만하지 않다. 나같이 용렬한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황금 참빗이요 길잡이다. 몇 구절 인용해보자.


 "좋은 공을 이루고도 물러나지 않으면 예로부터 허물이 많게 된다(功成身不退, 自古多愆尤)." 세상에는 공을 이룬 사람도 많고 공을 이루려고 밤낮 노심초사 애쓰는 사람도 많다. 공(功)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 자리, 감투다. 감투를 너무 오래 지키려고 애쓰다가 망신으로 끝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 어떻게 나아가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물러나느냐도 중요한 것이다. 


 칭찬은 마약, 남의 칭찬이 그리워서 너무 오랫동안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눈에 띈다.


 "시비와 사랑과 미움을 죄다 녹여 없애 버리고 텅 빈 몸을 세간 속에 붙어 있도다(是非愛惡銷除盡, 惟寄空身在世間)." 


 정민 교수 말마따나 옳으니 그르니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감정이라고는 없는 텅 빈 몸을 이 사바세계에 맡겨 두고 살다가 저세상으로 가겠다는 탈속정허(脫俗靜虛)의 경지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의 아름다운 시구를 남기고 이 세상을 다녀간 나옹 선사가 생각난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나는 이 말을 모든 집착이나 구속에서 해방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것도 집착이요, 사랑하거나 아끼는 것도 집착이다. 마음속에 남을 두고 연연하는 것은 마음을 비운 상태가 아니다. 이 말은 실제로는 마음을 비울 수가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구도자나 철인(哲人), 세상 풍파에 직접 시달리지 않고 지내기 때문에 인생살이에 대한 현실감이 부족한 극소수의 종교인들은 마음을 비우란 말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고물고물 열심히 살아가는 필부(匹夫)들은 말로는 비울 수 있어도 속마음은 미움, 시기, 경쟁, 애증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억울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보고도 연민이나 동정, 그 어떤 정의감이나 분노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 미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의 감정도 느끼질 못한다. 도저히 비울 수 없는 마음을 두고 자꾸만 "비워라, 비워라." 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을 그렇게 하질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죄의식이나 무능함밖에는 없다.


 창밖을 내다보니 그 무섭게 퍼붓던 눈도 어느 사이에 뚝 그치고 하늘 저쪽으로 어슴푸레 구름에 쌓인 달같이 보이는 해가 나오고 있다. 하늘은 오늘 마음을 비웠나 보다.(2014,12)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