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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여거사(八餘居士)
leed2017

 

 지난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은 추운 겨울이었다. 신문에 오대호(五大湖) 중에 온타리오 호를 제외한 나머지 호수들은 모두 80% 이상이 얼어붙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날씨가 너무 춥다 보니 아침 산책은 엄두도 못 내고 사흘이나 집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유리창을 통해 보는 바깥 경치, 특히 눈 덮인 수목원과 그 사이로 희끗희끗 보이는 산책길은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 눈 아래 험버(Humber) 강은 꽁꽁 얼어붙은 데다 그 위에 눈이 덮이니 하룻밤 사이에 강은 비단이 깔린 고속도로가 되어 버렸다. 어렸을 때 생가(生家) 앞 낙동강이 떠오른다. 날씨가 추워 강이 얼면 우리는 좋아라 강에 나가서 썰매를 타고 놀지 않았던가.


 올 같은 겨울은 집에서 주는 밥이나 먹고, 책이나 읽고, 누웠다 앉았다 빈둥거리는 게 하루일과였다. 늙은이의 노후생활이 이만하면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보고 웃으면서, "구태여 돈 들여가며 먼 데 갈 필요가 어디 있나, 집이 곧 천당인 걸." 했더니 말이 없다. 그러다가 "하루 세 끼를 장만해야 하는 주부 생각도 좀 해야지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는 비수보다 더 앙칼진 항의가 날아들었다. 그 말도 말이 되긴 되네.


 우연히 안대희 교수의 <선비답게...> 라는 책을 읽다가 조선 중기의 명신 사재(思?) 김종국의 이야기를 읽었다. 사재는 중종조의 명신 모재(暮?) 김안국의 아우로 그 역시 명신이었다. 그는 기묘사화로 벼슬에서 쫓겨난 뒤에 호를 팔여거사(八餘居士)로 바꾸었다. 팔여거사란 세상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 여덟 가지가 넉넉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어느 친구가 팔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첫째,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먹고, 둘째,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푹 자고, 셋째, 땅에서 솟은 맑은 샘물을 마시고, 넷째, 서가에 가득한 책을 뽑아 일고, 다섯째, 봄철에는 꽃을, 가을철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여섯째,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듣고, 일곱째,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하게 맡고, 여덟째, 이 일곱가지를 넉넉하게 즐길 수 있는 것도 복(福)이기에 팔여라고 했다 한다.


 위의 팔여에는 그 어느 것도 거액의 재물이 요구되는 것은 없다. 모두 자연과 친근한 관계에서 오는 무공해 자연산들이다. 그러나 그는 벼슬살이를 할 적에는 위의 어느 것 하나도 즐길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멋진 삶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자기가 놓인 처지에 달린 것이다. 남들 앞에 자기를 드러내는 화려한 의상 쇼(fashion show)같은 인생을 꿈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요구되는 쾌락 위주의 삶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나같은 백면서생(白面書生)이야 위의 어느 것을 해 보고 싶어도 해볼수 없는 처지다.


 팔여거사 김종국이 세상을 떠난 지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때와 비교해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내용에 있어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요즈음 세상에는 문명의 이기(利器)에 의존해서 즐거움을 찾는 경우가 예전보다 몇 백 배 늘었다고나 할까. 노래방에 가서 기계 반주에 맞추어 넉넉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고(반주가 사람을 맞추는 게 아니라 사람이 반주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우스운 꼴이긴 하지만), 유람선을 타고 망망대해를 떠다니고, 극장에 가서 영화 연극을 보고, 골프장에 가서 돈을 내면 몇 시간 골프를 칠 수 있고..., 수 없이 많다. 모두 삶을 여유롭게 재미있게 하기 위해 생겨난 수단들이다.


 요즈음 세상에는 우리가 소위 청복(淸福)이라 부르는 행복, 즉 재물이나 권력 같은 세속적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 누리는 깨끗한 즐거움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런 행복은 자연에서 얻는 즐거움이 주가 되기 때문에 도시 생활에서는 이들을 넉넉하게 누리면서 살기란 매우 힘들다.


 나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살았으니 거사(居士) 자격은 훌륭하다. 문제는 팔여(八餘). 이 나라 이 도시에서 토란국과 보리밥을 먹기는 참으로 불편하고 솔바람 소리를 듣고 매화와 국화의 향기를 맡는 것도 어려우니 팔여는 커녕 일여(一餘)도 어럽다. 나도 일흔을 넘었으니 시골로 돌아가서 살 생각도 가끔 해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하나의 사치스러운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 이미 세속(世俗)에 찌들대로 찌든 속물(俗物)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팔여거사를 들먹이며 살고 싶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망상인가.


 사재가 무오사화로 벼슬에서 쫓겨나 경기도 고양 시골집에 돌아가서 살 때 이웃 마을에 사는 변호라는 선비가 위로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재는 그에게 답장 대신 시(詩) 한 수를 써 보냈다. ‘...내 집이 좁고 누추해도/몸 하나는 언제나 편안하네/ ... /무료할 거라고 생각지 말게/진정한 즐거움은 한가한 삶에 있나니 (....我廬雖?陋 ....眞樂在閒居)


 마음을 한가롭게 갖는 데서 진정 즐거움이 온다면 그 한가로움은 우리 스물네 시간 생활 전반 어느 구석에서나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구태여 시골에 가서 땅을 파서 우물물을 마시고 눈속에 핀 매화를 찾아다니는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다. 망중유한(忙中有閑)-. 바쁜 중에도 틈을 내 한가한 짬이 있다는 말이다. 나같이 은퇴를 해서 서둘러야 할 일도 없는 사람은 한가로운 시간, 한가로운 마음이 너무 많아서 탈이 아닐까. (20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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