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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형과 아모르 파티(운명애, amor fati)
kwangchul

 

 2년 후면 캐나다에 거주한 지 50년이 되며, 결혼 50주년이 된다. 2014년 은퇴하기까지 약 40여 년 여러 직종의 작은 비즈니스를 운영하며 열심히 살았다. 그 기간 동안 이곳 본토박이 캐나다인과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물론 고객과 업주 사이의 대화였지만 영어를 제외하고는 내가 훨씬 그들보다 문학이나 상식 면에서 월등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내가 접촉했던 캐나다인은 북미 대륙에 관한 지식과 상식 외에는 세상 제반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고 관심도 없어 보였다. 이미 중, 고등학교 때 세계문학전집을 읽어 광범위한 독서의 양을 확보한 우리들과 북미대륙에 관한 지식만 갖고 있는 그들과의 비교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의 소치로 여겨진다.

 비록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교육을 받고 비상체제 전시하에서 자란 우리 세대들이었지만 교육의 열성만을 놓고 볼 때는 한국에서 우리가 훨씬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모든 학문에 기본이라는 철학만 놓고 비교해도 한국전체 국민의 수준은 올림픽 메달 순위로 매긴다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금메달 감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국가의 민족이 "소크라테스"를 “테스형”이라 부르며 “너 자신을 알라"를 가사에 삽입하여 애창곡으로 만들어 노래할 수 있을까?

 "니체"의 주저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체사상인 초인(Ubermensch)의 긍정인 “아모르 파티"(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를 신나게 노래하며 "디오니소스"적인 초인의 정신인 춤을 무대에 올려서 출 수 있을까?

 니체는 575개의 짧은 글로 쓰인 책 "아침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 지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깎아 내리지 마라. 그런 태도는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꽁꽁 옭아매게 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지금까지 살면서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자신을 항상 존귀한 인간으로 대하라"

 니체가 운명에 대해 말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다. 운명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인 "아모르 파티"(Amor Fati)이다. 운명은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운명의 필연성은 긍정하되 그것에 저항하여 지금 이 순간의 삶과 그를 즐기며 만들어가는 나 자신의 힘에 중점을 두는 데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때 가수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 파티" 또한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산다는 게 다 그런거지~~자신에게 실망 하지마~~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슬픔이여 안녕~~,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아모르 파티, 아모르 파티"

 그렇다고 긍정하며 박수치고 환호하는 디오니스적인 광란의 춤이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에는 있었다.

 "그대들은 본적이 없는가, 돛이 둥글게 부풀어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면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그 돛처럼 정신의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면서 나의 지혜는 바다를 건너간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글이다.

 하지만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며 바다를 건너가는 지혜를 담은 그의 역작은 당시의 유럽사회에서 철저한 외면을 당하게 된다. 1883년 집필을 시작해 1885년까지 3년 동안 학계와 대중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도 줄기차게 출간은 하였지만 4부로 구성되어 있는 그 책의 마지막인 4권은 자비로 겨우 40부만 출판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상업적인 실패에 승복함이 없이 니체는 그 후 출간된 “이 사람을 보라"에 이렇게 반박하였다.

 "나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에게는 그런 시대가 죽은 뒤에야 나타나기도 한다.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하는 학술기관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의 예언은 사후 20세기에 정확히 이루어졌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재판과정을 방청석에서 지켜보며 쓴 작품으로서 비교적 역사적 사실성이 뚜렷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살펴보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현자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는 누가 이 시대에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인지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한다.

 소크라테스가 이해한 "너 자신을 알라"의 참뜻은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인데 그래서 현명하다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한다. 그래서 그는 현명하다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물었다 한다.

 그 결과 그가 얻은 결론을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소크라테스: 그 사람들보다는 내가 더 지혜가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아마 아름다움이나 선한 것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들은 모르면서도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그와 반대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관점에서 그들보다는 더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이래~~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뱄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그러나 니체의 관점에선 세계의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퇴폐 또는 타락이라는 의미의 "데커던트"(decadent)라고 불리며 비판의 대상일 뿐이었다.

 니체는 1888년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주장하는 문학 비판 철학서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모든 시대의 현자들은 삶에 대해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언제 어디서든 그들은 삶이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삶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로 말하였다. 심지어 소크라테스조차도 산다는 것은 오랫동안 병들어 있었다는 뜻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니체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소크라테스는 이미 인생에 지쳐 있었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중 어느 편이 더 좋은 일을 만나게 될지는, 그건 신 밖에는 아무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고 죽기 전에 한 마지막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2500년 전 이미 내세를 믿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선 재판의 결과로 내려진 사약의 임종은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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