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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Identity)
kwangchul

 

 6월 26일 오후 2시 BMO 축구장. 캐나다 여자축구대표팀과 한국 여자축구팀과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하여 많은 캐나다인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캐나다 ‘메이플리프’ 국기와 캐나다 팀을 상징하는 빨간색의 유니폼을 입은 축구팬들에 의해 광장은 온통 빨간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중에 빨간색의 유니폼을 입은 나와 아들이 있었다.

 언뜻 캐나다인들의 빨간색 유니폼과 같아 보였지만, 두 사람이 입은 유니폼의 왼쪽 가슴에는 ‘코리아’라는 글씨와 함께 호랑이가 그려있는 전통 한국축구팀의 응원복장이었다. 시합 전 서양계인 작은며느리가 어느 팀을 응원할 거냐고 내게 물었다. 친선경기인만큼 어느 팀이 이기든 상관없이 좋은 경기를 보고 싶다고 나는 응답하였다.

 세계 랭킹 5위인 캐나다와 15위 정도인 한국 팀의 경기는 예상했던대로 강한 캐나다 팀의 위세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랭킹을 무시할 수 있는 저력이 한국 대표팀에게는 있었다. 비록 약세인 듯 보였지만 철벽같은 수비를 바탕으로 날카로운 공격은 캐나다 팀을 당혹하게 만들었고, 응원하던 1만 6천여 명의 캐나다인들에게 쉴새 없는 아쉬움이 흘러나오게 하였다. 그 중에는 나와 함께 한국 팀을 응원하러 갔던 내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들: 아빠 캐나다 선수들은 내가 많이 알고 있지만, 한국 선수들은 낯설어 자연히 캐나다 팀을 응원하게 되네.

 아버지: 괜찮아. 친선경기인데 뭐!

 아! 그러나 그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비록 친선경기라 하더라도 캐나다 선수의 거친 반칙으로 한국 선수가 넘어지면 분노가 솟구치면서도, 한국 선수가 반칙하면 괜찮아 바로 그거야 그렇게 경기의 흐름을 끊어야 돼.

 경기 결과는 0대0 무승부였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원정경기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잘싸운 경기였다.

 1974년 캐나다에 온 이래 48번의 캐나다 생일인 캐나다데이를 맞이하였다. 그 중 44번은 캐나다 시민권자, 4번은 영주권자의 신분이었다. 거의 반세기의 긴 세월이다. 이 오랜 기간을 살았으면서도 매해 7월 1일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캐나다데이를 나와는 상관없는 날로 치부하며 덤덤히 보내왔다. 캐나다의 국가인 ‘오! 캐나다’를 들어도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으며 그냥 덤덤히 듣는다.

 그런데 ‘애국가’와 ‘오! 캐나다’ 양국의 국가를 동시에 들을 기회가 있었다. 6월 26일 BMO구장이었다. 양국 국가의 순서가 있었고, 관례대로 방문 국가의 국가가 먼저 연주되었다. 경기 전 울려 퍼진 애국가는 내겐 한국인이 외국에서 듣는 대한민국의 국가였다. 내 눈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곧이어 캐나다 국가인 ‘오! 캐나다’의 순서였다. 1만 6천여 명의 우렁찬 목소리가 스타디움을 흔들었다. 그 중에는 캐나다 국가를 열심히 따라 부르는 내 아들도 있었다. 그때 그는 여지없는 캐나다인이었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나 캐나다인으로서 40여 년을 살아온 내 자식이 캐나다 팀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비록 4년마다 치러지는 월드컵 경기 기간에 태극기를 차에 부착하고 한국 팀을 응원하던 내 아들이지만, 막상 캐나다와 한국팀의 경기에서는 자국의 팀인 캐나다 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50여 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아버지인 나는 아직도 캐나다인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비록 한국 국적을 포기하였고, 법적인 시민권자이며 고국을 방문할 때는 캐나다 여권을 사용하고 있지만 ‘정체성’ 운운할 때는 자연히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50여 년을 이 땅에서 살았는데도 어눌한 영어보다는 한국말이 편하고, 햄버거보다는 김치와 밥이 더 좋다. 물론 이민 온 자체에 대해서도 후회가 없다. 이민은 또 하나의 시작이며 새로운 탄생이었다. 어차피 이민의 정의를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민은 자신의 문제를 이주하려는 국가에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발현이며, 그것의 달성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라고!

 팬데믹의 영향으로 한국으로의 여행이 많이 제한되었던 규제가 풀리면서 고국을 방문하게 되어 40여 일을 보냈다. 나는 그 기간만큼은 진짜 한국사람이 되어 한국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캐나다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였던 것처럼 이번에는 고국에서도 어딘지 이방인의 감정 간극을 발견하게 된다.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그래서 인간은 여행을 하나보다.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떠나야만 하는 여행. 따지고 보면 인생도 결국 익숙해지면 떠나야 하는 좀 더 긴 여행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80을 향해 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민 1세의 정체성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불굴의 개척자로 이 땅에서 살아온 이민 1세이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까지가 한계다. 바통은 넘겨졌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2세, 3세는 어떤 정체성을 갖게 될지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캐나다가 이웃인 미국의 용광로와 같은 사회가 아니라 각 민족의 특성을 중요시하는 모자이크 문화의 성숙한 사회라는 것에 안도감을 가져본다. 우리들의 2세, 3세들의 정체성은 캐나다라는 특수 토양 속에서 그들의 특성을 지키면서 잘 자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져본다.

(2022년 캐나다데이, 미시사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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