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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인!
kwangchul

 

5월초 주말, 큰 아들 부부와 "중국 여인"(The Chinese Lady)이라는 극명의 연극을 보러 갔었다.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 "서 로이드"(Suh, Lloyd)이며, 단 두 명의 배우만 출현하는 90분 분량의 드라마인데 여주인공 역할의 배우가 한국계 "로지 사이먼"(Rosie Simon)이었다.

주제가 비록 동양을 소재로 하였다 해도 영어로 하는 연극은 이해하기가 싶지 않다. 그래서 연극을 보러 가기 전 사전 지식을 넓히기 위해 주제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게 된다.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중국 여인으로 알려져 있는 "에이폰 모이"(Afong Moy)는 1834년 10월17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오게 된다. 그녀는 당시 14살이었으며 중국 남부 지역인 광동시에서 미국 뉴욕시 거주 무역 상인인 "카니 형제"와 함께 미국 땅을 밟게 된다. 2년 내지 3년 후에 중국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약속이 있었던 것 같으나 그녀는 영영 고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비교적 중류 이상의 집안에서 자라난 그녀가 어떻게 미국 무역상인에 의해 거래가 되어 미국에 오게 되었는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으나 미국에 온후 "중국 여인"이라는 타이틀로 상품화되어 전시되게 된다.

광고: 중국 여인을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을 후회합니다.

입장료: 성인 25전, 어린이 10전.

전시내용: 1)중국여인 옷. 2)중국말과 젓가락을 사용하여 음식 먹는 방법. 3)약 10센티(4인치) 길이의 전족된 발과 그 발로 걷는 모양.

그 연극의 메세지는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와서 전시용품으로 상품화되어 서양인들의 호기심이 된 그녀의 눈에 비친 서양 세계이다. 그녀는 울부짖는다. 중국인이 여러분들의 자녀를 중국에 데려와 이 애가 서양 아이들이라고 선전하면 당신들의 심정은 어떠하겠냐고?

우리 부부는 1974년 토론토에 도착해 1975년 첫 애가 태어났다. 그 해 몬트리올로 이주하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동양인이 보기 드문 시대였다. 몬트리올 외곽 "피엘폰"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는데 한 백인 어린아이가 그의 어머니에게 저 사람들이 "차이니스”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당황해 하며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그녀는 그 순간 차이니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중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의미가 담긴 말로 받아드린 것이다.

한국인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있다. 고국이 그다지 잘 살지 못하던 1970년 당시에도 한민족은 특유한 우리 민족만의 자부심을 놓아본 적이 없는 민족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인이냐고 물으면 코리언이라고 강하게 부정하며 한국인임을 강조하여 말한다.

하나, 잊지 말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의 눈에 비친 모든 동양인은 차이니스라는 것을! 비록, 세계가 좁아지고 국가간 교류가 많지만 인간의 본성은 다른 뿌리를 가진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캐나다에 중국인 이민은 대략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캐나다는 철도 건설이 붐을 이르던 때였다. 당연히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하던 당시였다. 그 때의 국제적인 중국의 위상은 최악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때였다. 왜냐하면, 그 시점에 영국이 조작해서 만들어낸 아편전쟁의 결과로 패전국이 되어 반 식민지 상태로 전락되어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노예들이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노예들에 근사한 대우를 받는 조건으로 중국인들을 해외에 팔아먹는 조직적인 브로커들에 의하여 많은 중국인들이 캐나다에 왔다. 주로 "캐나디안 퍼시픽 레일로드“(Canadian Pacific Railroad)에 고용되어 철도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그들은 정당한 이민자들이었지만 그 서류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 내용은, 이민을 와도 한평생 가족을 초청해 동반하지 않는다는 서약이었다. 백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눈에 비친 중국인은 노예들과 흡사한 일회용 반창고와 같은 맥락의 소모품일 뿐이었다. 그냥 모멸의 존재인 징크(Chink)일 뿐이었다.

캐나다 정보국의 내부 고발자의 익명의 투고로 시작된 글로벌 뉴스의 폭로 기사는 캐나다 정국을 뒤 흔들어 놓았다. 결국 트뤼도 연방수상은 특별위원회보고관(Special rapporteur)을 구성하게 되었고 그 수장으로서 "데이빗 존스톤"을 임명하게 된다. (2007년 당시 보수당 정부 수상이었던 "스테판 하퍼”에의해 캐나다 연방 총독으로 임명된 적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중국 정부의 캐나다 선거 간섭이 실제로 있었고 그 과정에서 중국의 공관원들이 7명의 자유당 후보와 4명의 보수당 후보를 접촉하였으나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한다. 또한 현 자유당 출신 "한동" 국회의원이 토론토 주재 중국 총영사를 만나 2년 이상 정치적 보복으로 중국에 연루되어 있던 두 마이클(Michael Spavor, Michal Kovrig)을 석방하면 야당인 보수당에 이득을 줄 것임으로 석방을 지연해달라는 기사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발표하였다.

오히려 중국 총 영사에 두 캐나다인이 억류되어 겪는 고충에 대해 탄원하였다 한다. 다행이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에서부터 발생하였다 하여 미국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그것을 빌미로 반 동양인 증오 분위기를 조성해 아시아계를 공격한 적도 있었다. (한국인도 희생되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해결하기 힘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이다."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대부분의 인종차별은 백인들의 제한된 시각의 차별의식에서 발생되었다.

모자이크 문화와 같은 캐나다의 민주주의를 견고히 지키기 위해선 극우 주의자들의 백인계가 아닌 타민족에 대한 증오에 의한 인종 차별은 저지되어야 한다. (2023년 5월 28일)

 

<참고: 칭크(Chink)-중국인을 나타내는 영어의 모멸어이다. 전 세계적으로 중국인에 대한 비하 용어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어의 짱깨와 비슷한 맥락의 속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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