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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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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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와 십자가의 상징이며 동물과 자연환경의 수호성인 프란체스코(1182~1226)가 태어난 이탈리아의 중부, 아시시 서북쪽에 그를 기념해서 세운 성 프란체스코 성당이 있다. 새벽이면 환상적인 오색구름이 드리우는 로카 마지오레(Rocca Maggiore) 성채 아래에 마치 성 아구스틴이 그의 ‘신국론’을 펴낸 '하느님의 도성' 같이 우뚝 솟아 있다.

 옛날에 죄인들의 사형이 집행된 곳이라 지옥의 언덕(Collis Inferni) 이라고 불렀으나, 프란체스코의 유해 위에 성당을 지은 후로는 천국의 언덕(Collis paradisi)이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희생양이 된 후부터 예루살렘의 갈보리 해골산이 구원의 언덕이 되었듯이. 

 아래•위층으로 나뉜 교회당 아래층에 성 캐더린 예배처가 있고 치마부에, 시모네, 마르티니 등이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천장까지 가득 차 있다. 교회당 지하엔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가 있다. 치마부에가 그린 ‘사도행전에 나오는 네 사도들’은 이층 교회당에 있다. 불투명한 금빛으로 그렸는데 프란체스코 수도사들과 복음을 전하며 순례하는 모습 같아 보인다. 

 가장 눈길을 끌면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의 그림들. 미술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찬란한 그는 스승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인 치마부에를 앞지른 화가로 더 유명하다. 그는 도식적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자연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는 성 보나벤처가 쓴 ‘프란체스코의 설화’를 세 개의 모티브, 즉 성 프란체스코와 하느님, 성 프란체스코와 인간, 성 프란체스코와 자연으로 나누어 스물여덟 개의 벽화를 1층 제대 주변에 그렸다. 

 프란체스코 성인은 자신의 꿈과 환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네 개의 아치형 벽에 일곱 편씩 그린 연작 중에, 프란체스코의 생애에서 전환기가 되는 ‘소명의 순간’과 ‘교회의 꿈’, ‘목마른 자에게 샘물이 솟게 하는 프란체스코’와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는 단연 나의 마음을 끌었다. 

 ‘소명의 순간’은 프란체스코가 어느 날 성 다미아노 교회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할 때 환상 속에 같은 음성이 세 번이나 들려 온 장면을 그린 것. 

 “프란체스코야, 어서 가서 내 집을 일으켜 다오. 내 집은 지금 무너져 가고 있고 파멸되어 가고 있구나.” 

 프란체스코는 이 음성이 자신의 영성 회복을 암시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옷가게에 가서 옷들을 가지고 나와 팔아서 성 다미아노 교회의 사제에게 바쳤다. 화가 난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들을 꾸짖는다. 아들은 자기가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말한다. 

“지금까지 나는 당신을 아버지라 불렀지만, 이제부터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만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 당시의 환상을 자신의 문제로 여겼으나 그 ‘집’은 로마교회를 상징한 것임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그 음성은 그에게 종교적 사회적 대전환의 계기가 된다. 

 그는 또한 늘 목마르고 가난한 자의 친구이며 자연계의 벗이었다. 목 말라하는 가난한 이에게 산길에서 물이 나오게 기도하는 프란체스코와 함께 서 있는 당나귀는 성인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정한 벗이었다. 프란체스코가 임종의 자리에서 그의 나귀에게 나를 태워주느라 수고가 많아 고맙다고 말하자 그 나귀도 눈물을 흘렸다는 설화가 있다.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는 한 편의 동화다. 우리 큰아이가 겨우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뜰에 앉아서 놀다가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뭐라고 이야기하며 깔깔 웃는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생각난다. 아기 같이 순수하고 맑은 프란체스코의 마음속엔 무엇이나 투명하게 보이는 거울을 간직하여 자연계의 언어도 알아들었으리라. 

 그는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계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들에게 먹고 마시지만 말고 주님께 찬양하도록 노래도 가르쳐 주었으며, 새들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의 이야기를 알아들었다는 듯 부리를 그의 옷에 대보기도 하고 그의 주위를 나는 모습을 옆에 있는 수도사가 증인으로 바라보고 서 있다. 그 수도사는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지오토 자신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그림은, 프란체스코를 사랑했고 그의 첫 번째 여성제자인 성녀 클라라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자신의 부귀와 사회적인 지위를 다 버리고 프란체스코를 따르며 그를 도와 2수도회(프란체스코회)를 만들고, 후세에 제3수도회의 모태가 된 성녀 클라라가 다미아노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프란체스코가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나는 장례 행렬이 다미아노 교회 앞에서 멈춰 버리자 사람들이 손에 관솔불과 촛불을 켜들고 나오고, 클라라와 그의 자매 수녀들이 슬픔에 잠긴 채 뛰어나와 프란체스코의 시신을 얼싸안는 그림. 

운구마차가 여전히 그 앞에서 움직이지 않자 프란체스코의 유해를 그 교회에 안치한다. 클라라가 소천한 다음 함께 안치했다가 후세에 프란체스코의 유해를 이 아시시 성당에 옮기고 1230년에 성 프란체스코 성전을 봉헌한 것이다. 

 아시시 산 흰 대리석과 분홍빛 대리석으로 인해 노을빛이 도는 성녀 클라라 교회를 내려다보며 다시 로마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한 수사님과 수녀님이 평화의 기도를 바치고 나오는 듯 가파른 성당층계를 내려오며 미소를 보낸다. 나도 마음속으로 프란체스코 성인이 깨달음의 순간에 지은 ‘평화의 도구’를 속으로 노래하며 샬롬(평화!)의 화답을 했다. 

 

주여! 저로 하여금 당신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모욕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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