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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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눈물의 아들, 아구스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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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브로스 교회 뒷길에서 성자 아구스띤 성당을 찾아 한참 헤매다가 점심시간 10분 전에야 교회를 찾을 수 있었다. 성당 문설주 위 반달문에 아구스띤이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 받는 모자이크 그림이 성자 아구스띤 전기영화의 예고편처럼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성당안의 빈 의자에 잠시 앉아 기도하는 동안, 미국의 헨리 코레이 목사가 쓴 전기소설 ‘눈물의 아들, 아구스띤’을 우리말로 옮기던 때의 뜨거운 감동이 되살아났다. 

 아우렐리우스 아구스띤(354~430) 자신이 쓴 ‘고백록’에선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 출신으로 복잡다단한 열정의 삶을 산 성자 아구스띤의 일생을 부드럽고 알기 쉽게 묘사한 코레이의 소설. 거기 나오는 감동적인 장면들은 번역이 끝날 때까지 뜨거운 눈물이 흐르게 했다. 

 신학자이며 서양 철학의 선구자이며 시인인 아구스띤보다 어머니 모니카의 심정에서, 그리고 아구스띤을 사랑하던 여인 멜라니의 쓰라린 사연 때문에 더 그랬다. 이교도인 파트리키우스와 결혼한 모니카가 겪는 가정생활의 불행과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남편과의 갈등을 아들을 위한 눈물의 기도로 승화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읽는 가슴을 적신다. 

 젊은 시절엔 관료적이고 정열적인 아버지를 닮았으나 늦게야 어머니의 영적인 성품을 찾은 아구스띤. 그의 깊은 마음속에 진리로만 알고 쌓아 올린 지성의 탑이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를 만나며 무너져 내리기까지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특히 밀라노로 이주했을 때 모니카는 아들 때문에 암부로시우스 주교를 찾아가 여러 차례 상담을 하곤 했다. 밀라노 교구 감독인 암부로시우스는 그 당시 쟁쟁한 수사학 교수인 아구스띤이 삐딱한 태도로 가뭄에 콩 나듯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눈여겨 보며 모니카를 위로해 주었다.

 "당분간 그를 혼자 놔두십시오. 스스로 잘못된 믿음을 깨달을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이 함께 하실 겁니다. 눈물의 아들은 결단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아들과 함께 있을 때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드린 끊임없는 눈물의 기도를 하느님은 마침내 들어주셨다. 마음속에 줄곧 타오르다가는 스러져 버리는 진리에의 갈망이 밀라노의 한 작은 집 뒤뜰 무화과 나무아래에 엎드려 흐느끼는 아구스띤의 오열과 함께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때 담 너머로 들려오는 동네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천사의 음성처럼 그에게 영감으로 다가왔다.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하는 듯한 그 소리를 따라 그는 친구와 함께 앉아 있던 의자로 뛰어가 좀 전에 꺼내 온 성경책을 펼쳐서 읽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로마서13:13~14)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를 찾은 그는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완숙시키는 새로운 전환점에 서게 된다. 

 아구스띤이 그의 깊은 상념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허무함과 비통에 울부짖었고 드디어 그의 양심의 소리, 즉 하느님의 음성을 담 넘어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통해 듣게 된 것이다. 

 그 후 그는 알프스산의 카시키아쿰 농장에 들어가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보내다가 387년 부활주일 성야에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에서, 어머니 모니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 아데오다투스, 친구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부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12년을 함께 살아 왔으나 결혼도 못하고 헤어진 멜라니와의 뜨겁고 가슴 아픈 사랑의 종말,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데오다투스의 죽음, 그리고 그와 함께 마니교의 길을 걸었던 절친한 친구 스펜디우스가 갑자기 병으로 죽으면서, 자기 어머니가 원하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충격적인 일들이 그에게 한 번에 몰아닥친다.

  


1846,Ary Sheffer의 그림 <아구스띤과 어머니 모니카>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영겁의 날개 밑에 돌아 온 아구스띤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전기적인 참회의 ‘고백록(401년)’을 썼고, 15년에 걸쳐 쓴 ‘삼위일체론(400~415)’, 모든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 속에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동일시한 ‘신국론(413~426)’과 ‘하느님의 도성’ 등은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가 아구스띤에게 새로운 삶의 동력이 돼 이루어진 열매였다. 

그 외에 그가 한때 몰입했던 ‘마니케이즘에 대한 논박’ ‘도나티스트파에 대한 논박’ ‘펠라니안파에 대한 논박’ 등을 하느님이 주신 그의 ‘쌍날 칼’ 같은 붓으로 적어나갔다.

 그 당시 로마교회는 혼란기에 있었고, 교회의식 가운데 찬미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때였는데 암부로시우스 주교는 자신이 손수 신앙시를 지어 교회 안에서 부르게 했다. 젊은 시절에 자작시를 낭송한 적이 있고 음악에 조예가 있던 아구스띤이 교인들이 찬미가를 부르는 아름다운 광경에 감동하여 지은 시가 있다.

 

님의 앞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올 때,

그때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요.

그 노래는 경건한 시냇물이 되어 

내 좁은 마음에 흘렀습니다.

나는 한아름의 위로를 안은 채

얼마나 울었는지요.

얼마나 울었는지요.

 

하느님의 사랑에 눈뜬 아구스띤은 또 이렇게 노래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나이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님을 사랑했나이다! 

 

 암부로시우스 주교가 그에게 세례를 줄 때 그는 시편 42편 ‘목마른 사슴’을 읽었다. 암부로시우스는 그 ‘목마른 사슴’의 얼굴 위에 입김을 불고, 그의 이마와 입술에 십자가를 긋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거룩한 이름으로 세례를 줬다. 나도 마음속으로 ‘목마른 사슴의 노래’(시편42편)를 화답하듯 불러보았다.

 

오-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함 같이

당신 사모 하나이다, 주여…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처럼, 그때의 아구스띤처럼 나도 목이 마르고 가슴이 메어온다. 나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이 성당 안에 함께 있음을 느꼈다. 사랑하는 님을 만난 듯 안도와 평온함이 갈증으로 갈라진 내 심장을 단비처럼 적셔주며 치유해 주는 듯했다.

 벽에 걸린 아리 쉐퍼(Ary Sheffer)의 그림(1846년 작) 속에서 모니카가 다정하게 아들의 손을 잡고, 같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며 "얘야, 이제 이 세상에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나는 지금 내게 남겨진 일이 무엇이며, 왜 내가 아직도 이 지상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 나의 모든 희망이 다 이루어졌다“고 아들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참고

 

* 아구스띤: ‘아우구스티누스’의 라틴어 발음 약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발자취 

 

354년 타가스테에서 출생

380~381년 ‘미와 적합론’ 저술

386~387년 ‘아카데미아 학파의 논박’ ‘행복한 생활’ ‘질서론’‘독백’ 저술

387년 개종

391년 수도회 창설하고 ‘하느님의 종들을 위한 수도규칙’을 냄

396년 히포의 주교로 선출

401년 ‘고백록’ 저술(어둠과 빛, 선과 악, 육과 영, 죄와 은총, 혼란과 평온의 처절한 갈등의 자서전적 표현) 

400~415년 ‘삼위일체론’ 저술

413~426년 ‘신국론, 하느님의 도성’ 저술(아구스띤 사상의 정화(精華)). 

430년 히포의 주교로 사망하기까지 주교로서의 사목 직무에 열성적이었고 시민들의 상담역인 시민법관도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