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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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을 떠나버린 빌 램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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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 여 년 전에 토론토에 정착한 우리 부부의 멘토이며 언제나 유머러스하고 건강했던 빌 램 목사님이 췌장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여섯 달이 지난 유월 아침의 꿈이었다.
  - 우리 부부가 먼 여행에서 돌아와 침실의 큰 유리창 문을 열었더니, 창 문턱에 비둘기만큼 큰 참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크고 둥근 눈으로 나를 바라 보는데, 빌 램 목사님의 눈이었다. 속으로,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픈 사람이 왜 여기에 앉아 계셔요?’ 그러자 어느 사이 들어선 내 동생 석구가 내 옆에서 대답한다. ‘ 걱정말아요. 이 새는 그렇게 빨리 죽지 않아요.’ -
  그래서 나는 램 목사님은 이승의 경계선을 넘어서려면 한참 멀었거나 완쾌되는 기적이 일어나리라 믿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물론이고, 우리가 아는 한인 교회 목사님들과 우리 자녀들도 그분의 완쾌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한 보람도, 내 꿈의 희망도 헛되게 한 달이 지난 새벽에 램 목사님은 우리 곁을 아주 떠나버렸다. 
그날 아침 램 목사님 부인 지나의 전화를 받고 남편 민 장로는 그의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 한 시간도 안 되어 돌아온 그는, 램 목사는 이미 장의사의 손에 넘겨져서 바로 화장하고, 딸네 식구들과 가족장을 치른 다음 몇 주일 후에 교회에서 추모식을 갖기로 지나가 결정했다는 것. 
그 동안엔 조문을 사양하고 가족들이 쉴 수 있게 도와 달란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서양인의 정서를 이해하기 보다 왠지 허망하고 눈물이 솟구쳐 서글픈 마음만 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며 빌 램의 생애를 감사하는 추모식>을 그가 세상과 작별하고 25일이 되는 7월 4일 오후 5시에, 샌자일스 킹스웨이 장로교회에서 유족과 교인들과 친구들이 함께 드렸다. 미망인이 된 지나를 비롯해서 아무도 우는 이가 없어 나는 몰래 우느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마뉴엘 신학교에서 찬송가학을 전공하고, 연합교회에서 목회하고, 연합기관-생명의 전화 등-에서 봉사하다가 은퇴 한 후 장로교로 이적한 빌 램은 모든 사람들이 따르는 선한 목자였다.
 
    
우리 부부가 집에서 가까운 샌 자일스 장로교회에 나가자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램 목사님이다. 첫날 친교 시간에 우리가 한국에서 온 줄을 알고 생명의 전화를 아는가 묻기에, 내가 한국생명의전화 이사로 알란 워커 목사님이 쓴 <생명의 전화> 를 우리말로 옮겼으며, 제1기 상담원으로 11년 봉사하였다고 했더니, 자기는 생명의 전화 본부의 총무로 일할 때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했다고 말하면서 옛날 얘기와 인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한국 생명의전화가 개설된 이듬해와 1982년 세계 서울대회에 참석해서 나하고 만난 터였다. 한국에서부터 따라 온 생명의 전화 줄은 길기도 하구나, 하면서 그가 주관하는 홈 그룹(구역예배)에도 들어갔다. 그의 집에서 모이는 홈 그룹에 참석한 첫날, 그는 20년 전 생명의전화 서울 대회 때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내가 빌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여러 장이 나와서 홈그룹 회원들의 박수까지 받았다.
 램 목사는 한국생명의전화 창립 원장인 이영민 목사와 토론토 임마누엘 신학대학 동창생이며 서남동 한신대 교수와 함께 수학했다. 당시 기독교 장로회(기장)는 유신 반대와 민권운동에 앞장섰을 때이므로 기장이 주도해 설립한 ‘생명의전화’도 군사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더구나 캐나다 연합교회는 기장과 교류하는 자매 교단이고 토론토에는 반정부 인사들이 활동하고 있을 때라서 캐나다 연합교회의 램 목사가 한국에 올 때마다 형사들이 따라다녔다. 그래서 한국은 민권 탄압의 나라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를 만나면서부터 편견을 벗었다. 그 후로 그는 우리가 필요한 일은 열 일 제쳐놓고 돌보아 주었다.
 2002년에, 그는 한국총영사관에서 열린 <성지의 향기-윤경남 사진> 전시회에 캐나다 교우들이 많이 참여하게 도와주었다. 그 다음 해에 토론토대학 동아시아도서관에서 <한국전통가옥 사진전시회> 때도 램 목사는 많은 한국 문우들과 소창길 목사님, 강석제 목사님, 조성준 의원님 부부, 맥스 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영문 포토 에세이, The Fragrance of the Holy Land 출간기념회는 2008년에 램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주관해주었다.
  2011년엔 램 목사 부부가 교회에서 그들의 금혼식 잔치를 하면서, 다음 차례는 유니스와 샘 부부(윤경남 & 민석홍)라고 광고하는 바람에 생각지도 않던 금혼식 잔치를 그가 화끈하게 이끌어주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오고 있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서 그의 손을 잡으며 인사할 때 그의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의 찬 손에 놀라, 라보헴의 아리아처럼 ‘그대의 찬손!’하면, 그는 농담인양 ‘난 미미가 아니에요!’ 하며 웃을 때 그의 몸이 정상이 아님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병원 입원실에서 그의 두 손을 마지막으로 잡았을 때는 조금 온기가 있기에, ‘오늘은 따뜻한 손!’하면서 뺨에 키스해주고, 격리실이라 얼른 쫓겨나오면서도 문앞에서 돌아보자 여전히 미소 짓던 빌!
 내가 그의 조그마한 가죽 수첩이 좋아보여 눈독을 들이니까, 힘들게 구해 주었지. National Geography 애독자인 그는 내게 사진작가이면서 이 책을 왜 안 보느냐기에, 빌이 다 읽은 다음에 주면 읽겠다고 해서 한 아름 안겨주었고. 유명한 캐나다 여류 사진작가인 캐트린 카누가 톰슨홀에서 사진작업 강연하는 것도 구경시켜주었지. 나는 받기만 하고 그가 부탁한 일은 들어주지 못한 일이 언짢게 떠오른다.
 빌은 몇 해전에 우리 부부를 구엘프의 텔리 캐어 모임에 초청한 자리에서 내게 ‘한국 생명의전화’이야기를 하란다. 워낙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건 싫어하는데, 그것도 캐나다인 앞에서라니, 완곡하게 거절 했다. 
또 한 번은 캐나다의 한 부호의 아들 빌 위나가 목사가 되어 일본 북해도에 갔는데, 자비로 평생을 바쳐 선교사역을 하다가 태평양 전쟁 말기에 강제 추방을 당해 빈손으로 토론토에 돌아와, 가족들 모르게 혼자 살다가 쓸쓸하게 작고했던 그 목사의 일본어 전기를 영어로 번역해달라고 한다. 너무 부담스러워 사양했다. 나는 지금 <윤치호 영문일기>를 번역하느라 진땀 빼고 있다는 핑계로.. 
그는 캐나다 최초의 감리교회인 헤이베이 감리교회사를 여러 해 만에 힘들게 탈고해서 최근에 출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론토 동물원에서 *스코필드 박사 동상 제막식이 있던 날 함께 참석하려다가 그가 시간이 나질 않아 우리만 다녀왔다. 그 후, 빌과 지나는 우리를 구엘프 대학에 데리고 가서 스코필드 박사가 소아마비 왁진을 발명해낸 그의 연구실과 기념관을 구경시켜주었다. 
우리 교회가 해마다 여는 시니어 깜짝 여행에 토론토 동물원의 스코필드 박사 동상이 있는 한국정원에 가기로 약속 했건만….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고자 했고 한국인들이 스코필드 박사를 추모하는 정성을 캐나다인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어제 오후 5시의 빌 램 목사 추모식엔 예상대로 손님이 많았다. 서구세계의 장례식에서 고인의 이야기로 억지 웃음을 자아내는 게 딱 질색인데, 빌의 장례예배도 예외는 아니지만, 다행히 빌과 아주 친한 두 분의 목사가 추모사를 간단하게 했다. 찬송가학을 공부한 빌은 음악인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 
샘(민석홍 장로)이 찬양대에서 테너로 봉사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고, 우리교회 음악감독이며 오르가니스트인 한국인 김란 선생의 교회음악 기획을 도와주었다. 오페라 가수이며 우리교회 찬양대원인 커티스가 추모식에서 독창을 했는데, 5년 전에 빌의 80세 생일에 바치는 시편90편을 자신이 작곡한 노래이다. 우리 교회에 새로 부임한 젊은 부루너 목사는, 빌 램 목사는 사도 바울처럼 약해졌을 때 더 강해진 놀라운 그리스도인 사상가라고 추모했다. 
두 외손자들이 각각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성경구절을 봉독하고. 빌의 딸은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가 moving dictionary 였다고 자랑하며 울먹였다. 우리는 빌이 평소에 좋아하던 찬송, ‘주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함께 찬양하고 예배를 마쳤다.
다과를 나누는 시간은 잔치 분위기였다. 빌과 55년의 우정을 나눈 하워드 목사에게 나도 한국에서부터 30년의 긴 우정을 나눈 사이라고 자랑하면서, 한국 생명의 전화에서 빌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더니, 지나가 이 사진들을 보았을까요? 하고 웃긴다. 
또 한 분의 친구인 에드워드는 계속 눈물을 닦아내는 내게 손을 벌리고 ‘슬퍼하지 말아요. 빌이 천국에서 이렇게 문을 열고 기다릴테니까.’ 그는 신세계 여행사 사장이던 김창범 장로와 절친한 친구 사이여서, 정 많고 눈물 많은 한국인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먼저 떠난 이를 생각하며 소리 내어 통곡하는 우리 문화가 훨씬 인간적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빌이 하늘나라에 영광의 보좌 옆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 때까지는 못 보는 게 아닌가. 남편이 출장을 갈 때도 나는 그동안 못 볼 생각에 울음보가 터지는데…
 빌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받기만 한 것 같아 몸둘 바를 모르는데, 다행히도 빌의 다정한 친구가 된 남편 샘이 5 개월 동안 빌의 병원 운행 기사 노릇을 해주었다. 샘은 올해 정초에 폐 수술을 하고 경과가 좋아진 것을 확인하기도 전이어서,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면, 의사가 운동하라고 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온 거야, 하면서 매주 한 두 번 지나를 램 목사가 입원한 병원에 데려다 주기도 했다. 
빌은 목사이지만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다른 교인들이 면회를 못 오게 해서, 교인들은 샘을 통해서만 빌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철저한 신앙인의 모범을 보였다. 암 선고를 받은 후, 담담하게 말하기를, 내가 죽는 것은 겁나지 않지만 아직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뒤에 남을 지나가 걱정이라면서 작은 가죽수첩에 적은 메모를 보여준다. 
주님께, 자기를 더 살려서 일을 시키실 건지 데려가실 건지를 알려달라는 기도문이다. 병원 치료와 의료진의 지시에 잘 순종하면서도 단순히 생명만 연장하는 키모 치료는 거부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주차장 같은 삶이라면서 머지않아 다시 만날 터이니 감사한 마음으로 기다리자고 주위 사람들을 위로 했다. 병문안보다는 전화로 기도하고 찬송 부르기를 부탁했다.
육체를 떠나 새가 되어 우리집 창밖에 잠시 머물다가 영원한 안식의 문턱을 넘어 하느님의 품으로 날아가고자 한 그의 심혼 Soul은, 지금 하느님의 품 안에서 평안과 기쁨, 사랑과 행복, 새로운 빛 속에 그가 증거하고자 했던 부활의 기쁨을 맘껏 누리리란 생각이 든다. 
주님 부활로부터 성령 강림까지 50일의 상징을 생각하면서, 빌이 떠나고 50일 째 되는 날까지 당신의 심혼이 와서 앉았던 창문 앞에서 샘과 함께 아침마다 기도할 게요.
 하지만, 벌써 그리워지는 빌, 당신과 함께 지은 아름다운 나의 새 이름 Yunice가, 우리가 함께 만든 이메일 인삿말 Shalom and Rejoice Be with you in the Lord!! 를 보내면서. I Love You in Christ!!
 
Yunice.
 
* 스코필드 박사: 우리나라의 ‘34번째 독립운동가’로 꼽히는 캐나다인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박사를 추모하는 추모공원이 토론토 동물원 안에 2012년 6월1일에 개막했다. 
스코필드 박의 동상은 장연탁 조각가의 작품이다. 정운찬 전 총리와 캐나다 내의 많은 유지들이 이 행사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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